2막 8장 (2008~2011)
#2. 다시 돌아온 맨체스터
한국 고등학교 첫날 '노는 아이들과 섞이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자'는 내 다짐은 영국 고등학교 첫날에도 유효했다.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첫인상의 중요성을 일찍 깨우쳤을 때라, 세간의 편견과 달리 자신감 있고 당당한 아시아인 친구 이미지를 각인시키려 노력했다. 웨이트를 하여 몸을 키웠고 의식적으로 수업 시간에 손을 들어 질문했다.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난 건데, 그땐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그냥' 친구가 아닌 '아시아인' 친구라고 인식하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전자의 사고를 가졌더라면 고등학교 생활 동안 더 마음의 문을 열고 친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 전략은 성공했고, 입학 첫달, 교내 인기 많은 친구의 생일파티에도 초대되어 순탄한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과학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Economics, Mathematics, Accounting, Applied Business를 주 과목으로 하고 Ethics, Philosophy 등 과목을 보충적으로 들었다. 당시 영국의 최상위권 대학들은 회계, 경영과 같은 실용적인 과목을 선호하지 않았고, 경제, 수학, 과학, 역사 등 전통적인 과목을 더 선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어서 못하는 과학보다는 내가 잘하고 즐길 수 있는 과목을 선택했다. 당시 대학교 전공으로 경제학과 경영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고 끝에 결국 경제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이유는 돌이켜보면 유치하다. 첫째, 영국에서는 한국과 다르게 경제학 입학성적이 경영학 입학성적보다 더 높다. 경제학은 최상위권 전공에 속하여 인정을 받았지만, 당시 경영학은 확실히 비주류였다. 둘째, 성격상 추상적인 것을 안 좋아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동시에, 티비, 잡지, 신문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학문과 현실 세계 사이의 괴리감을 줄일 수 있었고, 세계 흐름을 이해하고 있다는 지적 자만심과 만족감이 컸다.
학업 외에도, Young Enterprise라는 스타트업 창업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1년 동안 학교와 연계된 기업 자문가와 함께 사업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기획자로 참가하여 예비대학생들에게 필요한 대학 지침서 「Survival Guide for University」를 출판했다. 전국 서른 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학 진학 후 학업, 기숙사, 돈 관리, 취업, 자취요리 등에 관련된 살아있는 정보를 수집했다. 창업자금을 모으고 기업 계좌를 열고, 혁신적인 사업 아이디어를 도출하며, 시장조사 및 상품개발을 진행하고, 실제 판매 시장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발전 정도를 평가하는 등 고등학생으로서 쌓기 어려운 경험을 쌓았다. 전국적으로 약 500부 이상이 판매됐던 걸로 기억하고 아쉽게도 본선 진출은 하지 못하였다.
첫 해 성적은 아쉬웠다. 수학과 경제 성적은 좋았는데 회계, 경영 실무 과목에서 삐끗했다. 당시 A-Level은 2년 과정이었고 첫 해 성적, 예상 성적(predicted grades), GCSE 성적, 교내 추천서, 자기소개서, 교외 활동 등을 종합해서 대학에 지원하였다.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첫 해 성적에서 삐끗하다 보니 또 한 번 슬럼프가 왔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그동안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유학의 목표가 '대학 입학'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학벌, 학별 외에도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터득한 자신감(can-do-mind)과 자기 성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해에는 친구들과 불필요한 만남은 피했다. Mark, Anthony는 대학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를 늘 공부벌레라고 불렀다. 그와중에 피파 하나만큼은 지겹도록 했다. Mark, Anthony는 동갑 쌍둥이인지라, 자기 분에 못이기면 전선을 뽑고 문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하우스파티를 할 때면 지하방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수학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실수를 줄여가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때면 아버지가 떠올랐다. 모르는 문제를 틀리는 것에는 관대하셨지만, 아는 것을 틀리는 것에는 엄격하셨던 아버지가. 경제는 학교 수업 외에도 신문, 칼럼, 유튜브 등을 적극 활용했다. 시험이 100% 주관식 에세이 형식이었기 때문에, 그래프를 활용하여 논리적으로 내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나의 정답이 없는 유형의 시험이라 수학에 비해 점수받기가 더 까다로웠다. 외울 것이 많아서 중요한 내용은 자기 전에 암기를 하고 누워서 복기를 했는데, 만약 기억이 나지 않으면 다시 일어나 해당 부분을 다시 읽고 침대에 누웠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그 부분을 100% 떠올릴 수 있으면 100% 암기가 된 것이라 판단했다. 친한 친구 Ramin과 한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면서 서로의 논리에 문제가 없는지 검증했고, 판단이 어려우면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다. 회계와 경영은 나중에 내가 훗날 사업을 운영하더라도 꼭 필요한 지식들이라며 스스로 동기부여했다. 특히 회계에서는 고도의 꼼꼼함이 요구됐고, 하나의 실수가 전체의 실수로 이어지는 과목이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눈을 두배 크게 떠서 시험에 임했다. 경영은 이름 때문인지 경제와 비슷할 거라는 내 편견과는 달리, 매우 실용적이었고, 어쩌면 회계와 더 교집합이 많았다. 꼭 알아야 하는 부분은 녹음기로 내 목소리를 녹음하여 이동하면서도 복습했다. 윤리, 철학에서는 "힘(power)란 무엇인가", "양육(nurture)인가 본성(nature)인가"와 같은 거대 질문을 두고 열띤 토론을 하며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다. 특히, 지금도 관심이 많은 "국가(state)인가 시장(market)인가"를 주제로한 토론이 가장 인상 깊었다. 영국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있어빌리티 한 음악, 스포츠 활동도 다양했지만, 대학 입시에 도움되지 않는 것이라면 최소화했다. 유튜브에서 숨은 명곡을 찾는 게 취미였고, 수요일마다 Lee, Mark, Anthony와 풋살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막바지에 들어설 때는 재적당하지 않을 만큼의 출석률을 유지하면서 전략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불필요한 수업이 많다고 생각했고 공강이 띄엄띄엄 있으면 에너지 소모도 크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루는 입시 담당 선생님, 담임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저조한 출석률이 문제였다. "지금 대학 지원 현황이 어떻게 되지?", "네, 여기여기에 지원하여 모두 conditional offer 받았습니다", "설마 이 대학이 A 대학은 아니겠지?",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그 대학이 맞습니다". A 대학 옆에 비슷한 이름의 직업전문대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착각하셨던 것 같다. 내가 학교에서 튀는 학생도 아니었고, 그분도 입시만 담당하는 선생님이셨기 때문에, 단순히 내 출석률만 보고서는 나를 불성실한 학생으로 팓단했을 거라 생각한다. 역시 과정보다 결과였던 것일까. 성적이 꽤 좋았어서 마지막까지 열심히하란 말 외에 별다른 불이익 조치는 없었다. 다섯 대학 중 두 학교를 우선적으로 선택했어야 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졸업한 대학을 선택하게 됐다. 각자의 장단점이 뚜렷했고, 결국 가치판단의 문제였던 것 같다. 성적 발표 전 여름 방학, 부산으로 MT 온 재학생들을 미리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느낌이 좋았고, 그 느낌이 판단에 있어서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피 말리는 초조함과 기다림 끝에, 2011년 8월 18일 목요일(17일 수요일이었던가?), 대학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Congratulations' 단어가 보이자 그 뒤는 읽지도 않고 누나를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당시 외출 중이셨다. 두 분께는 전화로 불합격했다고 몰래카메라를 했는데, 수고했다며 나를 위로하시고 집에 가서 얘기해보자고 하셨다. 집에 도착하시고 대학 합격 이메일을 보여드리자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8년 간의 시간들이 주마증처럼 스쳐 지나갔다. 맨체스터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외국 편의점에서 무언갈 사본 것, 다시 한국에 와서 내 자아에 혼란이 왔던 것, 보조기에 의지해 또다시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던 것, 종이에 꾹꾹 눌러쓴 암기노트, 인간관계에서 좌절을 느꼈던 것, 그럴 때마다 떠올렸던 부모님 얼굴, 그리고 두 주먹 꽉 쥐고 이 꽉 물며 버텨왔던 그동안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 짝사랑하던 누나가 있었는데, 대학에 입학하면 사귀어준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사귀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도 재밌었다.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고, 약속대로 그 다음날 바로 사귀게 되었다. 지금은 애 낳고 잘 살고 있더라.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내가 인간관계에 자신감을 갖게 된 때가. 유학생활 동안 여러 상황들이 있었고, 때로는 아파했고 때로는 기뻐했다. 과정을 통해 벌거벗은 나를 자주 마주했고, 나를 알게 되니 남을 볼 여유가 생겼다.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기게 됐고, 앞으로 누굴 만나도 처세술이나 대처법에 있어서 자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존감도 덩달아 올라갔고, 알에서 깨어난 왕처럼, 긴 인고의 세월 끝에, 지금의 당당한 모습이 만들어졌다. 10월 입학 전 두 달 동안 선배들을 비롯하여 입학 동기들도 미리 만나 친해지면서, 부푼 가슴을 안고 꿈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더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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