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곁의 페미니즘] 겨울의 초입, 길가로 밀려난 이들을 생각하며
(※이 편지는 오마이뉴스 연재기사입니다. 홈페이지에서 직접 보시면(http://omn.kr/1vysm) 작가의 편지낭독 음성을 바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 재회의 고리가 되어준 편집자 고 이환희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페미니즘을 뭐라고 번역하시나요? 우린 '성평등주의'로 읽습니다.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자는 얘기죠(오바마도 페미니스트라네요!). 페미니즘이 오해받는 한국,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두 여성의 이야기. 2주마다 한번씩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대와 성장을 꾀해봅니다.[기자말]
성애님, 6월부터 시작한 편지가 벌써 11월까지 왔네요. 한 계절을 함께 보내고 또 다른 계절의 문턱 앞에 와 있는 듯해요. 저는 요즘 세밧사(세상을바꾸는사회복지사) 사무실 이사 등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사 뒤엔 서점 고양이 허시먼을 보는 날들이 확 줄었어서, 허시먼 얼굴이 자꾸 아른거립니다.
성큼 쌀쌀해진 날씨만큼, 이전 편지에서 주요하게 짚었던 대선 역시 많은 장면이 선명해졌어요. 거대 양당 후보가 정해졌고 소수정당들도 최종 후보를 선출했고요. 한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는 차별금지법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고, '개 사과'로 논란을 벌였던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후보는 그걸 뒤집기에 열심이고... 그런데 그러는 사이 서민들 삶은 어째 더 추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노량진 수산시장 앞에서 오래 투쟁하다 얼마 전 돌아가신 나세균 열사 소식(기사 보기)을 성애님도 들으셨지요. 멀쩡히 일하다 하루아침에 일터를 뺏긴 상인들의 고달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할 정치인들은 대체 얼마나 공감하고 있나 싶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저는 사실 불안하고 어려운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회가 길거리 홈리스들 삶에 조금은 더 관심을 가지게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오히려 반대더라고요. 쉼터를 폐쇄하고 지하철 역을 걸어 잠그고, 짐을 폐기처분 하는 등 가혹한 맨얼굴이 드러났네요.
며칠 새 갑작스럽게 찾아온 영하의 추위에 길가 노숙인들은 어떨까 마음이 쓰여요. 코로나 시국은 일상이 됐고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은 계속 길어지는데, 길 위에서 사는 이들의 삶은 괜찮을까 싶어서요.
최근엔 하루아침에 노점상이 쓰레기차에 쓸려간 일도 있었어요. 서울 중구청 측이 서울역 앞에서 커피노점을 하던 한 할머니(홈리스)의 마차를 쓸어갔다고 해요. 관련 기자회견에 며칠전 다녀왔는데, 할머니께서 얼마나 속상하셨는지가 표정에서 다 느껴졌어요. 회견 뒤 할머니께 기운 잃지 마시라, 건강 조심하시라고 등을 쓸어드렸는데, 오히려 제게 밝게 웃어주시며 '고맙다, 수고한다' 말씀하시더라고요.
서울시·중구청은 서울역 홈리스들 짐가방도 모두 쓰레기로 처리했대요. 거기엔 주민등록증부터 틀니까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는데... 이 정도면 거의 '강도' 수준 아닐까요. 겨울을 앞둔 지금, 법 절차까지 어겨가며 무리하게 홈리스 물건들을 버려야만 했는지 강한 의문이 듭니다(중구청은 지난 7월에도 강압적 물품폐기로 논란이 일자 "인지하지 못하고 쓰레기로 처리, 당사자에 불편을 느끼게 해 안타깝다"고 한 적이 있거든요).
서울역 철거의 경우엔, 중구청 담당 부서들이 서로에게 법적인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고 해요. 홈리스 숫자가 급증한 건 외환위기 직후였고, 자의반 타의반 거리로 밀려난 건데... 이들에겐 인권도 없는 건가요. 수많은 사람의 '살 자리'를 뺏은 행정 기관을 향해 "이것은 테러"라고 말하는 홈리스들에게, 우리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건 '명백한 폭력'이라고, 함께 외치고 싶습니다.
성애님, 여성 홈리스 분들을 길이나 미디어에서 본 적 있으신가요? '홈리스'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혹 남성은 아닌가요.
서울시 실태조사(2019)에 따르면 총 3353명 홈리스 중 여성은 678명으로 추정된다는데요, 전문가들은 이보다 많을 거라고 예측해요. 왜냐면 대부분의 여성 홈리스들은 가정폭력·친족 성폭력 등을 이유로 집 밖으로 탈출하고, 그렇게 나와서도 성폭력에 노출되는 탓에 찜질방이나 PC방 같은 유료 공간에 주로 머물거든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 홈리스'는 더 많겠지요.
지난해 방송된 EBS 다큐it(소개글)을 보면 여성 홈리스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어요. 그 속에서 만난 '비닐봉지를 모으는 사람'들의 삶은 저마다의 이유로 시작은 달랐지만 어느 순간엔 모두 비슷해졌습니다. 비슷하게 거리로 떠밀려 나와, 폭력에 노출되지 않으려 몸 곳곳을 비닐봉지로 채우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더라고요. 이들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남들처럼 편안하게 잘 자는 거래요.
그런데도 여성 홈리스들이 안전히 머물 공간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전국 홈리스 시설은 130여 개뿐인데 그마저도 주로 남성 전용이고, 여성 전용은 딱 12곳에 불과하다고 하거든요. 여성 홈리스 보호소는 수적으로도 적지만 지역으로 갈수록 찾기 어려워서, 어떤 곳에선 방 한 칸에 다 몰려서 잔다고 해요.
성애님, 경제 외환위기 이후 늘어난 홈리스 숫자는 코로나 시국에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네요. 경제성장률은 회복을 넘어 상승세라는데, 왜 삶에선 좋아지는 게 없는 것 같을까요. 우리는 언제쯤 권리를 지닌 온전한 시민으로 살 수 있을까요.
이른 첫눈이 내린 아침, 올해 겨울은 또 얼마나 추워질까 싶어 걱정이 앞섭니다. 당신이 계신 곳은 부디 따뜻하기를 바라요.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EBS 다큐it '비닐봉지'편(영상), 쉽게 보이지 않는 이들이 마음에 걸리는 당신에게 추천합니다.
2021년 11월 10일
가을햇볕 뒤 찾아온 추위에 옷깃을 여미며, 혜미 드림.
첫번째 편지☞ 같이 걷게 될 당신, 멀고도 가까운 당신
두번째 편지☞ 이런 시대... 여자로 태어난 건 축복일까요
세번째 편지☞ 청년 부르짖는 정치인은 모르는 청년의 심각한 현실
네번째 편지☞ 길바닥 나앉은 목사, 청년 예수가 봤다면
다섯번째 편지☞ 노동자 과로사하는데... 윤석열 말에 한숨부터 나왔다
여섯번째 편지☞ '숏컷 괴롭힘' 사회... 아이를 낳고 싶다, 낳고 싶지 않다
일곱번째 편지☞ 늘어나는 비혼·비출산, 윤석열만 못 보는 현실
여덟번째 편지☞ 아프간 '난민'을 왜 내가 신경 써야 하냐고요?
아홉번째 편지☞ 여성 안 보이는 선거, 2022년에도 봐야 한다니
열번째 편지☞ 가족, 짐일까 힘일까... '정상' 너머 대안이 필요하다
열한번째 편지☞ 아파보니 알겠어요, 한국에 '돌봄'이 있나요?
열두번째 편지☞ 성범죄 무고 처벌 강화? 윤석열의 참 '후진' 약속
열세번째 편지☞ 뺏기고 내몰리는... '코시국' 여성 홈리스들의 삶
* 혜미와 성애가 2주에 한 번씩 주고받으며, 격주 금요일 게재될 예정입니다. 이 편지는 문학동네 이슬아x남궁인의 연재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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