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항상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론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누군가의 옆에 대체할 수 없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어 하면서도, 모두에게서 제발 깨끗이 잊힐 수 있었으면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싹 지워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다. 아니,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 생을 떠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어릴 때부터 한 것 같다. 그때부터 가끔 내 흔적을 찾아 지우곤 했다.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나중을 기약하면서.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도망치고 싶었을까. 뭐가 무섭고 싫어서 그렇게 숨고 싶어 했을까. 나는 어디로 가고 싶었을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림자가 되었다면 나는, 그때는 더 이상 도망치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을까.
어릴 때는 책장에 있던 소공녀라는 책을 몇 번이고 읽어서 책이 낡고 쪼개졌다. 제발 이웃집으로 누군가가 이사 오고 나를 발견해주기를 바랐다. 처음 해리포터를 봤을 때는 나에게 호그와트로부터의 초대장이 오기를 우스울 만큼 진지하고 절박하게 기도했다. 어릴 때는 집을 떠나고 싶었겠지. 지금 이 집이 아닌 다른, 나를 진짜 사랑해주는 가족들이 있는 집, 아무도 몰랐겠지만 사실은 내가, 누군가에게는 정말 소중하고 꼭 찾고 싶은 존재 일거라고 스스로 되뇌지 않으면 버틸 수 없던 순간들을 지나왔다.
여전히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집을 나왔고, 꽤 즐겁고 행복한 일을 하면서 사랑받고 존중받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 그만둬버리고 그림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다. 이제는 행복한 세상으로 떠나는 걸 꿈꾸지도 않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어떤 곳은 그려지지도 않아. 어딘가에 신기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이 행복을 감당하기가 버거운 걸까 나는. 그 행복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매일매일 증명해내야 하는 기분이 들어서 때려치우고 싶은 걸까.
더 이상 증명하지 않는 나는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걸까.
증명하지 못한 나는 그림자가 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아 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