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정신분석 상담의 기록
블라인드 글쓰기라는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서로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온라인으로만 글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글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내 글을 읽어줄 거라 생각하니 그제야 쓸 수 있게 된 이야기들이 있다. 딱 그런 마음이었나 보다. 오롯이 나 혼자 써내고 슬퍼하고 극복해내기는 너무 외롭고, 내가 아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알면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누군가 들어주었으면 하면서도 그 누군가가 내 얘기 때문에 같이 힘들거나 같이 무겁지는 않았으면 하는, 그 정도의 마음.
첫 글쓰기의 주제는 ‘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마지막 장면이 그랬다. 자신의 보청기를 꺼버리던 노인의 모습이 한참 동안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들을 수 없었다면 괜찮았을까. 요즘은 노이즈 캔슬링이라는 기능으로 듣기 싫은 소리를 지워버리는 것도 가능하니까 말이다.
나도 그처럼 보청기를 끌 수 있었다면 괜찮았을까. 가스레인지가 보일락 말락 했던 작은 키의 나에게, 너만 없었으면 아빠랑 결혼 안 했을 거라는 말이 들리지 않게, 주말마다 싸우는 엄마와 아빠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끌 수 있었다면 말이다. 방문 밖에서 누가 얘기하는 소리만 들려도 싸우는 소리인 줄 알고 잠들지 못했던 밤. 문을 열고 확인해보면 그만인데, 혹시나 진짜 싸우는 걸까 봐 방문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던, 그 한없이 컴컴한 공간이 조금은 줄어들었을까.
나는 내 귀로 들어오는 것이 힘들고 어려웠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말을 할 때는 항상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보다, 그들의 귀에 어떤 이야기가 들어가고 있는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내가 듣기에 힘들지 않은 이야기만 다른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 참는 것들이 차라리 내 안에서 없어져 버리거나 잊힌다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그렇게는 안되지
언제부턴가 다들 나는 이제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가지고 있는 바구니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크기인데, 대단히 크지도 넓지도 않은데.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다 못해 넘쳐흐르기 시작하는데도 티를 내지 않으니까 넘치지 않는 줄 안다. 그래도 내가 들은 것을 뱉어내기는 싫었다. 누군가의 귀에 들어가고, 내 어두움이 옮아갈까 봐. 차라리 내가 이 모든 감정을 삼키고 재가 되어버리는 게 편하겠다 싶었다.
종종 궁금하다. 잘 꺼내지도 않고, 펼쳐보지도 않는 예전의 기억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 때, 자꾸 기어올라와서 없어진 거 아니라고, 여기 분명히 있다고 나를 괴롭힐 때면. 뉴스에 나올 정도가 아니라서, 죽을 정도는 아니어서 구조되지 않은 사람들. 혹은, 너무 어려서 가시밭 위의 울타리라도 필요해서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누군가 비춰줄 기회가 없어서, 아니면 아무도 몰랐으면 해서 방구석에서 혼자 힘겹게 버텼을 텐데. 이제 와서는 어디 가서 티 낼 수도, 얘기할 수도 없는 사람들. 아무렇지 않은 척, 별일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에게 궁금하다.
잘 지내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금은 괜찮은지. 그리고 한 번이라도 소리 내어 이야기해 본 적이 있는지.
2021년부터 1년 넘게 ‘심층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의 상담을 하고 있다. 월요일, 목요일 오후 3시부터 45분의 상담. 상담을 시작할 때는 얼른 꺼내서 다 해결해야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또다시 힘들어지고 싶지 않아서, 하기 힘든 이야기든, 아무한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든, 뭐든 가리지 않고 다 솔직히 이야기하자고 생각했다.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생각보다 가벼워지는 문제들도 있었지만,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 내 마음이 흙탕물이 되지 않도록 겨우 겨우 잘 가라앉혀놓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상담을 하고 나오면 겨우 가라앉은 흙탕물을 한 껏 흔들어 재낀 기분이 들어서 더 이상 들여다보고 싶지 않을 때도 많았다.
계속 상담을 하다 보니 마음속에 쌓여있는 흙들은 아주 많은 단층이 있는 것 같다. 맨 위에 층을 겨우 꺼내보고 그것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이야기를 하다 보면 더 깊은 층이 있고, 더 깊은 층은 훨씬 단단히 묶여있었다. 이 이상 들여다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무섭게 치달았다. 그럼 정말 죽을 것 같은데,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그냥 모르는 척 묻어두고 있어야 지금의 상태라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의 상담을 다시 되짚어보고, 소화하기 위해서 상담 일기를 쓰고 싶었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혹은 용기가 되기 이전에 사실 이 글은 나를 위해서 쓰는 글이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경험과 상처들을 모두 되짚다 보니 토할 것 같은 마음. 그 마음들을 어쩔 줄 몰라서 글을 쓰기로 했다. 그 결말은 이 일기가 끝나도 정하지 못할 것 같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