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리섭대천 (利涉大川)

부숴야 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

by 이루리


언덕 위에 놓인 나의 단독주택은 바람을 자주 맞는다. 탁 트인 위치가 장점이지만, 동시에 바람길을 가로챈 자리이기도 하다. 바람은 늘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 집에 발길질을 해댄다. 덕분에 겨울이면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냉기를 막지 못해 웃풍을 친구 삼을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바람은 참으로 얄궂다. 대지를 가로질러 만물을 흔들고 깨워야 한다는 숙명에 몰두한 탓일까. 앞에 놓인 사물을 보지 못한 채 돌진하다가 길을 잃고 헤맨다. 길을 가로막은 사물이 산이라면 더욱 그렇다. 강제로 발걸음이 멈춘 바람은 습기와 독기를 품는다. 겨울이면 우리 집을 파고드는 차가운 공기처럼.


『주역(周易)』 열여덟 번째 괘인 산풍고괘(山風蠱卦)는 바로 산에 가로막힌 바람의 형상이다. 막힌 채 발이 묶였으니 통할 리 없다. 습해지고, 곰팡이가 피고, 끝내 썩는다. 그래서 고(蠱)라는 글자는 그릇 [皿] 위에 벌레 [虫] 세 마리가 앉아 있는 모양새다.


위험 신호다. 벌레는 밖에서 묻어 들어온 티끌과 다르다. 인간의 삶으로 옮겨보면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진행된 정체와 나태가 마침내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생각만으로도 서늘하다.

이쯤 되면 『주역(周易)』 산풍고괘(山風蠱卦)가 비통함과 고난, 고뇌를 선언하리라 짐작하기 쉽다. 그러나, 아니다. 고괘(蠱卦)는 절망의 끝에서 오히려 희망을 말한다. 괘사(卦辭)의 첫머리, “크게 형통할 것이니, 큰 하천을 건너야 이롭다 [元亨, 利涉大川]”라는 문장이 증거다.

썩은 곳이 드러나 절망에 휩싸이더라도 환부를 돌려낼 결단만 있다면, 길은 다시 열린다는 말이다. 말은 간결하지만, 실행은 어렵다. 인간은 순간의 고통을 핑계로 처방을 미루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을 키우다 보면 인간과 다른 장면을 본다.


미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 벌 역시 적지 않은 질병에 시달린다. 부저병이나 석고병과 같은 질환은 벌 공동체를 통째로 무너뜨리는 치명적 위협이다. 붕괴의 기로에 선 벌들은 망설임 없이 ‘사회적 면역’이라는 집단적 지혜를 발휘한다.


사회적 면역은 인간의 눈으로 보면 잔혹해 보일 수 있다. 신속하게 환부를 도려내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벌들은 병든 개체를 벌통 밖으로 몰아내고, 아픈 애벌레는 물어내 버린다. 조치를 마친 뒤에는 함께 모여 벌통의 온도를 38도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병균의 증식을 막기 위한 사회적 발열이다.


그들은 잔혹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문제를 인지하는 즉시 움직인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파멸이 도래하리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까닭이다.


그런데 인간은 종종 묘하게 비겁해진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 비겁함이 빚어낸 풍경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스무 살에 얻은 초상화 하나로 현실의 자신과 양심적 자신을 분리한다. 덕분에 방탕한 현실의 책임을 초상화로 미룰 수 있었다.


도리언 그레이가 쾌락과 악행을 즐길수록 초상화는 흉측해졌지만, 그는 자신을 외면했다. 심지어 어두운 벽장에 초상화를 가두고 방종을 이어간다. 안타깝게도 부패는 격리된 채 머물지 않았다. 결국 초상화의 부패가 현실로 번져 나왔고, 도리언 그레이는 자멸의 길을 택한다. 이처럼 내면의 환부를 도려낼 용기가 없는 자에게 미래는 썩은 과거의 연장일 뿐이다.

반면 찰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주인공 스크루지는 탐욕과 냉소를 껍질처럼 두른 채 인색함이란 공기 속에서 숨 쉬던 노인이다. 어느 날 그는 크리스마스 유령이 보여준 환영을 통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목격한다.

죽음의 순간, 조롱과 무관심 속에 방치된 자신을 본 스크루지는 떨리는 몸으로 추악한 자신을 직시한다. 그는 도리언 그레이와 달리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닫혀 있던 지갑을 열어 이웃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작은 행동이 혁신의 출발점이었다.

사실 인간의 삶에 환부가 생기지 않을 도리는 없다. 매일 수많은 욕망과 생각이 마음이 갈마들고, 관리받지 못한 감정이 구석에서 썩어간다. 마음에 축적된 찌꺼기가 장애물이 되고, 직시하지 않은 장애물은 마음의 길을 막아 혼란을 낳는다.

『주역(周易)』 산풍고괘(山風蠱卦)의 질문은 단순하다.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가졌는가.” 혁신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마음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하나씩 골라내는 세심한 행위에 가깝다. 꿀벌이 병든 애벌레를 판별해 골라내듯.

꿀벌은 매 순간 프로폴리스로 병균의 침입을 막으면서도, 이미 침입한 병원체를 골라내며 생존을 도모한다. 병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를 일이 없다. 인간으로 사는 한 감정, 욕망, 생각을 버릴 순 없다. 단지 성찰과 반성으로 넘치지 않게 조절하고, 이미 올라온 것들을 다독이며 해소할 뿐이다.

그래서 산풍고괘(山風蠱卦)는 “큰 하천을 건너야 이롭다 [利涉大川]”라고 조언했다. 큰 하천을 건너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현재 서 있는 위치에서 누리던 안락과 나태로부터 떠날 결단을 해야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의미다.

우리는 스스로 알 수 있다. 마음속에서 부패의 신호가 울리고, 좌절이 밀려오는 순간을. 썩은내 진동하는 순간, 불안보다 안도하자. 썩은 냄새는 혁신과 새로운 시작의 신호탄이다. 감각이 살아 있으니,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는 증거다. 진정 두려워할 건 괜찮겠지, 라며 스스로 주저앉히는 우리의 태도다.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다음에 집을 짓는다면 바람길을 점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할 인간이 자연의 흐름을 가로막는 장애가 돼서야 쓰겠는가. 창문에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는 바람 앞에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미안함을 건넨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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