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백비(白賁)

【山火賁卦】 기교를 초월한 완전한 장식

by 이루리


2025년 봄은 나에게 어두운 색으로 남아 있다. 처음으로 종합병원에 갔고, 불치병을 진단받았으며, 수시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때.


간호사가 건네준 입원복을 입던 순간 나는 이상하리만큼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병상에 누워 생각하니, 마치 군대에 입대하던 날의 느낌과 같아 불쾌했다. 저 멀리 보이던 부모님이 멀어짐과 동시에 엎드렸던 20대 초반의 나와, 입원실 유리문을 통과하며 격리된 30대의 나. 세속의 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는 일마저도.


무엇보다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이 벗겨진 채 낯선 공간에 밀려 들어왔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똑같았다. ‘신장 불치병’이란 진단은 그런 식으로 나를 맞이했다. 병실 침상에 누워 있던 나는 20대 초반의 신병과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불안과 두려움까지도.


하얀 천장, 하얀 커튼, 하얀 시트, 그리고 하얀 벽. 병실은 온통 흰빛이었다. 지나치게 무색한 공간은 더욱 내 존재를 지워버리는 듯했다. 일도 연구도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앞으로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리라는 긴장감. 사실 가장 힘든 건 옆 병상 환자의 코골이 소리도, 간병인들이 밤새 켜놓은 유튜브 소음도 아니었다.


오직 마음 안에서 시시각각 터져 나오는 어두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잔잔하던 내면을 통째로 흔들어놓고 있었다.


마음은 한껏 결핍으로 가득한데 시간은 전에 없이 풍부했다. 병원 창에 비춘 하늘만 바라보던 어느 날, 문득 남들이 다 한다던 SNS를 열어 봤다. 사실 나는 SNS를 거의 하지 않았다. 바쁜 삶 속에서 타인의 삶을 살펴볼 여력조차 없었던 까닭이다.


처음 살펴본 SNS 속 세상은 참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여행지에서 활짝 웃었고, 다른 누군가는 맛있는 음식을 입에 욱여넣는 중이었다.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허락받지 못할, 저마다의 행복한 시간.


사람들은 화려하고 즐거운데 나는 존재가 지워진 채 면역 억제제를 맞는 게 일상인 상황. 처음엔 씁쓸했는데, 점차 원망스러워졌다. 방탕이란 글자를 삶에서 지운 채 달려온 내 얼굴이 멍청스러워 보였다. 진정하라는 이성과 흥분하라는 감정이 매 순간 머리에서 싸워댔다.


사실 SNS에 나온 모든 장면이 본질적 아름다움인지 알 턱이 없다. 그저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과 머리가 자각한 내 모습이 상반되었을 뿐. 그 때 문득 이성의 손가락이, 한창 공부하던 『주역(周易)』의 옷자락 한 가닥을 끌어당겼다. 산화비괘(山火賁卦)였다. 산 아래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으로 장식과 꾸밈의 이치를 담은 괘다.


그런데 장식과 꾸밈을 해석하는 양상이 흥미롭다. 일례로 비괘를 해석한 중국 송나라 정이천은 “장식이 아름다운 건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화려함에 본질이 담긴 건 아니라는 일갈이다.


하루는 병원에서 퇴원한 여름날이었다. 사람은 더위에 지쳐가는데 정원의 꽃들은 생동감을 더해갔다. 나는 활기찬 꽃들 사이에서 약으로 부풀고 쑤시는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영혼을 잃고 앉아 있었다.

문득 벤치 옆 시든 장미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장미가 한창 화사하게 피어나는 시기인데 홀로 누렇게 변한 채 힘을 잃고 있었다.


정원을 가꾸던 어머니께 물어보니 진드기 피해가 있었다고 하셨다. 무슨 조치를 취해줘야 하지 않겠냐는 내 말에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셨다. 우리가 지나치게 개입하지 말고 꽃의 치유 능력을 믿어보자며. 꽃들은 옆의 꽃이 화려하든 생동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빛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는 말씀이었다.


시든 장미꽃을 보는데 양봉하던 때가 떠올랐다. 벌을 키울 때 분명 느꼈다. 벌을 키운다며 꺼드럭대는 인간이지만, 세상과 맞서는 주체는 결국 벌이라는 것.


인간은 환경을 조성해 줄 뿐이다. 벌은 늘 스스로 발전하고 병을 치료하며 생존하려 안간힘을 썼다. 옆에 있는 벌의 사회가 번성하던, 쇠퇴하던,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생존과 번영에 힘쓸 뿐.


결국 꽃도, 벌도, 제 할 일에 집중하며 저마다의 빛을 위해 하루를 살아낸다. 외부의 화려함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타인의 빛만 바라보다 정작 나의 빛을 무시하던 내 모습이 무안했다.


결국 나의 빛을 내는 건, 고유한 빛을 가진 나 자신이었는데.


어쩌면 삶은 꾸며댈 필요도 없는지 모른다. 그저 자신의 빛을 제대로 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화려하다는 장미조차 옷을 입은 게 아닌 것처럼. 그리고 벌의 중후한 비상(飛翔) 소리가 억지로 낸 게 아닌 것처럼.


그래서인지 『주역(周易)』 비괘의 마지막에는 “흰색으로 꾸미니 허물이 없다 [白賁, 无咎]”는 말이 새겨져 있다. 장식하고 꾸며대던 마지막은 결국 본래의 흰빛으로 돌아간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소박함으로 돌아가 본래의 진실과 하나가 되는 경지’라고 설명했다. 인위적인 기교를 초월한 자신만의 소박함이 가장 완전한 장식이라는 의미다.


누군가는 점을 쳐서 비괘가 나오면 불길하다고 했다. 소박한 꾸밈이 얼마나 높은 경지인지 아는 탓이다. 장식과 꾸밈은 늘 본질을 왜곡하면서까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사람이면 대체로 타인의 화려함에 압도되어 자신의 빛을 한탄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다시 병원에 입원하던 날 온통 하얀 병실 풍경이 새롭게 보였다. 병실의 하얀 공간은 어쩌면 나에게 선사한 소박한 꾸밈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꾸밀 수 없기에 나는 비로소 나의 빛을 제대로 자각하고야 말았다.


철학을 그토록 공부하면서도 몰랐던 사실을 병에 걸려 누워서야 인지하니 아이러니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더 열심히 약을 먹고 치료하며 언젠가 발현할 나의 빛을 기약했다.


노력에 보답하듯 내 몸은 조용히 회복했다. 불치병이라 온전한 치유란 없지만 일상에 돌아올 만큼 상태가 좋아졌다. 마음도 점차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빛을 들여보며 삶을 이어가는 중이다.

2025년 가을, 우리 집 정원에 끝까지 남아 노란빛을 내던 장미가 있었다. 다른 장미는 이파리를 떨구는데 홀로 고고하게 남아 첫서리를 앞둔 날까지 의연했다. 장미 앞에 우두커니 선 내 옆에 어머니가 다가오셨다.

기억하냐고 물으셨다. 무슨 말인가 싶었다. 어머니는 조심스레 장미 꽃잎을 만지셨다. 이 장미가 여름 내내 누렇게 병들었던 그 아이라면서. 알 수 없이 눈이 뜨거웠다. 내가 하얀 병실에 묻혀 노력하는 동안, 저 아이도 퍽 고단한 시간을 이겨냈구나 싶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퍼석하게 병들던 나의 2025년을 위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첫서리가 내리고 그 아이가 장미 모습 그대로 얼었던 날. 나는 가위로 장미를 잘라 땅에 묻었다. 어쩌면 끝까지 안간힘을 썼던 장미의 마지막은, 온전하길 바랐다. 2025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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