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곡, 첫날, 무제움콰르티어
실은 칠월 초에 열리는 취리히 학회 때문이었다. 유럽을 왕복하는 여정은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부담스러운데, 막상 붙은 논문을 발표 않고 버리기엔 아까웠다. 거진 유월 중순에 가까워서야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구글맵을 열었다. 그때 눈에 들어왔다. 잊고 있었던 꿈의 도시가.
여행은 늘 한 장의 상(像)으로부터 자라났다. 콩코드의 월든 호수가,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이, 카잔차키스가 일본 여행기에서 묘사한 교토의 료안지가 그러했다.
빈(Wien)은 달랐다. 도시 전체가 단일한 꿈과도 같았다. 플로리안 일리스가 그려낸 1913년의 빈은 절정에 다한 여름 정원처럼 찬란했다. 화려하고 섬세하고 정교하며 신경질적인 이 도시의 내력은 내 눈에 흡사, 스콧 피츠제랄드의 컷글라스 볼처럼 빛나 보였다. "화살처럼 날아가는 시간, 아름다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종착역" 혹은 이데아처럼. 혹은 슈테판 츠바이크가 그리워한 어제의 세계처럼.
구글맵을 줌인하여 선과 면으로 드러난 거리를 눈으로 훑었다. 아직은 일정과 예산의 일부에 불과한 지도상 한 점이었다. 열망이 울컥 올라왔다. 보고 싶다. 있고 싶다. 거닐고 싶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감정이었다.
이십 대 내내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Nec Spe, Nec Metu)"라는 경구를 좋아했다. 희망도 공포도 단지 마음을 일렁이게 할 뿐이라면 전부 내려놓고 평정을 유지하며 살고 싶었다. 그러한 바람은, 시간이 가고 경험이 쌓이고 책임이 커지며,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어 간다. 반복되는 일상을 무던하게 살아내는 건 분명 어른다운 일이며 자랑스러워도 될 일이다.
그럼에도 드물게 사랑이 찾아온다.
사랑이란 깨어지지 않는 꿈이다. 한번도 만난 적 없지만 그 어떤 모습이라도 좋다. 간밤에 내놓은 쓰레기가 볕에 훤히 드러나는 아침의 번화가든, 을씨년스러운 주택가 옆 요란한 고속도로변이든, 사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해질녘 금융가의 스산함이든, 뭐든 좋다. 그게 빈이라면 나는 사랑한다. 이 세계 사람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빈'이라 지칭하는 그 장소에 도달함으로써 내 사랑은 완성된다. 그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이며 그 어떤 순간이든 받아들인다. 그처럼 당신을 원한다. 희구한다. 실망 없이. 두려움 없이. 내가 아는 사랑의 한 가지 본질이다. 오로지 무한에 가까운 대상에게만 약속될 수 있는.
때로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 그 어느 곳에 서게 한다.
잘츠부르크를 지나칠 때까지만 해도 맑을 듯했다. 기차 차창 너머로 비취빛 강가에 늘어선 저택의 붉은 지붕이 또렷했다. 게다가 내겐, 2012년부터 어딜 가든 도착하는 곳은 맑아지고 떠나는 곳은 흐려지는 징크스도 있었으니까. 이번 여행도 예외는 아니어서 취리히에 머무는 내내 맑았으며 잠시 친구를 만나려 들른 뮌헨도 구름을 걷어붙인 채 유난히 덥고 쨍쨍한 얼굴을 보여줬다. 자, 그러니 빈도.
웬걸.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돌려보니 온통 빗줄기였다. 기차는 벌써 빈-메들링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중앙역까지는 앞으로 10분, 맑아질까? 그럴 리가. 내려보니 플랫폼이고 역전이고 폭풍우였다. 한해 절반은 비가 내리는 미 북서해 출신답게 레인자켓을 꺼내 뒤집어쓰고 13A 버스를 향해 돌진하는 그 짧은 새, 온몸이 쫄딱 젖어버렸다. 늘 친구들에게 반진반농으로 '해를 몰고 다니는 여자'라고 자랑했는데 한 방 맞았네. 물을 뚝뚝 흘리며 속으로 한참 웃었다.
버스에서 내려 뤼디거가세(Rüdigergasse)로 향했다. 육중하고 고풍스러운 건물 3층에 자리한 미아네 집은 모던하고 널찍한 복층이었다. 유럽의 살림집이 그렇듯 좁아터진 아파트를 상상했는데. 내가 묵을 손님방은 비스듬한 채광창이 달린 지붕 밑 방이었다. 중국 찻주전자와 디퓨저가 놓인 작은 탁자는 홀딱 반하도록 예뻤다. 앞에 앉으면 네모난 거울 안에 얼굴이 쏙 들어왔다.
주인인 미아는 스스럼없는 사람이었다. 부족한 자신감을 감추기 위해 베푸는 호의나 시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가슴을 탁 터놓고 다가서는 재능을 타고났다. 그래, 꾸밈없는 환대란 희소한 재능이야. 낯선 이를 집에 들일 자신이 없는 나로서는 이처럼 마음을 놓게 만드는 적절한 온도를 마주할 때마다 그저 놀랍다.
여장을 풀고 매무새를 추스린 후 바로 집을 나섰다. 오후 세 시였다. 빈에 허락된 시간은 사흘, 다소 피곤했지만 일분일초가 아까웠다. 뤼디거가세를 벗어나 큰길을 따라가면 몇 분 안에 나슈마크트(Naschmarkt)가, 다시 왼쪽으로 꺾어 죽 올라가면 무제움콰르티어(Museumquartier)가 나온다.
나슈마크트는 유서 깊은 도시라면 하나쯤 있을 법한 노천시장으로, 말하자면 서울의 통인시장이나 교토의 니시키 시장 혹은 프랑크푸르트의 클라인마크트할레(Kleinmarkthalle)와도 비슷한 지위가 아닐까. 둘러볼 시간을 따로 남겨놓지 않은 탓에 가운뎃길로 지나가며 빠르게 눈으로만 훑었다. 이미 여러 도시에서 여러 시장을 둘러본 데다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머무는 시애틀의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 좀더 마음에 들었다.
비는 기세 좋게 내렸지만 날씨는 온화하여, 무제움콰르티어 초입에 들어설 무렵엔 어느덧 레인자켓에 감싸인 몸이 후끈해왔다. 무제움콰르티어는 약 9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크기로 현대예술 및 문화에 관련된 60여개 기관이 들어서 있어, 세계 최대의 전시복합공간이라 한다. Q21, 쿤스트할레 빈(Kunsthalle Wien), 건축미술관(Architekturzentrum Wien) 등 여러 미술관이 유혹하지만, 이곳에서는 특히 레오폴드(Leopold)와 현대미술관 혹은 무목(Mumok, Museum Moderner Kunst Stiftung Ludwig Wien)을 볼 요량이었다.
레오폴드는 에곤 쉴레(1890-1918)의 작품을 최다소장하고 있는 단일 미술관이다.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및 그가 이끌었던 빈 분리파(Secession) 소속 작가들의 전시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찬란하다. 이들이 유년기와 장년기를 보냈던 시대는 세계1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인류의 지성과 도덕과 예술이 정점에 달했으며 오로지 진보만을 거듭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유럽인의 좋은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빈을 마시고 맛보고 호흡하며 일생을 보낸 두 토박이 화가의 작품은 꿈의 도시를 비추는 최초의 렌즈였다.
이로써 서곡 혹은 첫편을 마친다. 다음 편은 레오폴드에서 감상한 작품에 대해 중점을 두어 써내려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