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보고 이끌어주는 이가 다가오는 재능도, 그러한 인생도, 세상엔 드물다
클림트 전은 1층 로비를 거치자마자 바로 들어설 수 있는데, 쉴레 주빌리 쇼를 보려면 한 층 내려가야 했다. 우연의 일치라곤 하나 계단을 내려가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늘에 가까운 다락이 영성을 위한 공간이라면 대지에 면한 1층은 세속적인 삶을 위한 공간일 것이며 지하실은 꿈과 잠이 죽은 듯 가라앉는 무의식의 공간이 아닌가.
외부 대상에 관심을 기울였던 클림트와 자기 자신을 집요하게 파고든 쉴레는 작품의 흐름상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연대기순으로 작품을 나열하는 대신, 쉴레 주빌리 쇼가 특별히 초점을 맞춰 구성한 주제들 중에서 가장 먼저 꼽혀 첫번째 전시실을 차지한 건 "자아"와 "에고"였다.
처음 보는 순간, 대단한 자의식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벗은 몸을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 사지의 끄트머리는 시원하게 쳐내 버렸다. 정말이지 스무 살의 패기는 만국공통이다. 즐거운 그림은 아님에도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드는 건 구성 때문이다.
길쭉한 직사각형을 그리며 비스듬히 떨어지던 상체의 윤곽은 고관절 근처에서 직각으로 꺾이며 보는 이의 시선을 흐트러뜨린다. 그 아래 발목 잃은 정강이가 불안정하게 기울어지며 다시 한번 눈길을 잡아끈다. 감았는지 떴는지도 알 수 없는 눈빛은 오른무릎을 내려보며 삼각형의 가장 긴 변을 긋고, 다시 오른무릎은 더 큰 삼각형의 꼭지점 노릇을 하며 왼정강이로 떨어지는 시선을 한번 더 위로 쭈욱 끌어올린다. 일순간에 폭발하는 자아도취라 여기기엔 대단히 치밀하고 정교한 관찰력으로 짜여졌다.
쓰인 색 역시 구성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가장자리의 사지는 어둡고 한가운데의 토르소는 밝다. 탁한 올리브색, 황갈색, 겨자색, 다시 녹슨 듯한 적갈색으로 이어지는 흐름에 더하여 젖꼭지며 배꼽처럼 은밀한 부위가 다섯 점으로 붉게 도드라진다. 이 작품을 제외한 다른 시리즈는 모두 유실되어 흑백으로만 남아 있다고 한다.
<꽈리가 있는 자화상>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로 샐쭉한 시선이 매력적이다. 선은 단호하며 면은 침묵한다. 쉴레의 침묵은 클림트의 풍경화에 드러나는 평온한 퇴각과는 사뭇 달라서, 자신감에 차 있고 적극적이며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자신을 걸어잠그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표현의 일부다.
쉴레의 자기표현을 높이 산 건 클림트였다. 1907년, 클림트는 열일곱 살 먹은 그를 기꺼이 빈 예술계의 한복판으로 이끌었다. 유진 부댕이 젊은 모네를 거두어들였듯, 클림트 역시 어린 쉴레에게 화랑을 주선하고 후원자와 이어주며 1909년에는 비엔나 쿤스트샤우(Kunstschau)에 초청하기도 했다. 쉴레 역시 여러 작품을 빈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하며 그와 돈독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쉴레의 재능은 실로 니체적이었으나, 같은 도시 출신의 막강한 후원자가 없었다면 과연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을까.
알아보고 이끌어주는 이가 다가오는 재능도, 그러한 인생도, 세상에는 드물다. 두보가 어찌하여 군불견, 을 외쳤겠는가. 곁에 알아봐주는 이가 없다면 찾아나서야 한다. 세상 어디까지라도 쫓아갈 마음을 품고.
재능과 자의식에 넘쳤던 쉴레였다. "모든 아름답고 고상한 자질이 내 안에서 하나로 엮인다... 나는 영원한 생명력을 뒤에 남긴 채 썩어지는 과실이 되리라"고 자부하던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었다. 어머니였다.
그와 어머니의 관계는 과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린 쉴레에게 무관심했으며 분노한 아버지가 그림을 불태울 때도 말리지 않았다. 어머니를 향한 양가적 감정에 시달리던 젊은 화가는 결손가정에서 자란 손아래 아이며 고아들에게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결핍된 애정을 채울 요량이었는지 그는 자주 남녀 청소년을 집에 불러들였고 여러 그림의 모델로도 삼았는데, 외설적인 묘사 때문에 결국 이웃에게 고발당해 1912년 구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가장 가까운 이들, 특히 부모와의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질 때 아이는 깊은 상처를 입는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아, 언제건 어떤 모습으로건 끈질기게 돌아와 그 자신을 시험한다. "우리는 과거를 잊어도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던 <매그놀리아>의 대사처럼. 혹은 아래 그림처럼.
어머니의 안색은 죽은 듯 잿빛으로 생기라곤 찾을 수 없다. 두 아이를 안고 있지만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다. 혹은 그럴 일말의 여력도 없다. 무릎에 누운 아이 역시 탈진한 듯 눈을 감았고, 그 모습을 좀더 어린 아기가 놀란 듯 빤히 내려다본다. 설마 이들 중 누군가 이미... 죽었다면? 긴장감을 쉽사리 내려놓을 수 없다. 배색 역시 더께가 한 겹 앉은 듯 탁하여 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을 짐작케 한다. 살며 본 것 중 황폐하기로 손꼽히는, 관계의 풍경이다.
위 그림을 보자니 뮌헨, 노이에 피나코테크(Neue Pinakotech)에 걸려 있던 발트뮐러의 그림(왼쪽)이 떠올랐다. 그래, 이게 보통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애정어린 관계, 이상적인 모자상이지. 행복으로 빚은 듯한 새하얗고 오동통한 볼따구니와 티없는 호기심에 가득찬 눈빛, 세 아이를 앞세운 채 그늘에 수줍게 숨었지만 자랑스런 기색을 미처 감추지 못하는 젊은 어머니. 어린애가 곤혹스러운 나조차도 저 그림 앞에 서자 마음이 절로 녹아내리는데 하물며. 전형성은 때로 깊은 위안을 가져다준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게 땅에서도 이루어질 듯, 마땅히 그러리라 믿고프게 한다.
오른쪽 쉴레의 모자상은, 구도는 비슷하되 훨씬 복잡하다. 입체적이다. 이 그림의 아이 역시 어머니 품에 안겨 밖을 내다보지만, 동공이 활짝 열린 푸른 눈에 들어찬 건 공포일지 경악일지 알 수 없는 감정이다. 머리털은 쭈뼛 섰으며 손은 어머니의 가슴께에 얹혀 있다. 어머니는 깡마른 손가락으로 아이의 어깨를 꽉 붙든 채 그 볼에 얼굴을 짓누른다. 저 밖의 위협으로부터 아이를 지키려는 걸까 혹은 단순한 집착일까. 아이는 저 밖이 두려운 걸까 어머니가 두려운 걸까. 서로에게 꽉 달라붙은 두 가슴에 이 순간 들어찬 감정은 사랑일까 아닐까.
한때 상상했다. 몸처럼 마음에도 형태가 있다면 밀가루 반죽처럼 유연하고, 탄력적이며, 무엇보다 늘 비슷한 크기를 유지하려 들지 않을지. 한쪽이 눌리면 맞은편이 불룩 올라오듯이. 마땅히 그러리라 믿어지는 사이가 그러하지 못할 때, 주어야 할 마음이 주어지지 못할 때, 마음은 실망으로 골이 패인다. 패인 자리 맞은편에 자의식이 솟는다. 나를 보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이렇게 존재한다고.
쉴레는 말했다. "나는 만물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화난 자들조차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끔 사랑을 담아 쳐다보고 싶었다. 질시하는 자들에게 선물을 들고 찾아가 난 쓸모없는 존재라 말하고 싶었다."
결핍이 쉴레의 빛이었다. 사랑은 그림자였다.
마지막으로 몇 안 되는 그의 풍경화를 본다. 나무의 마른 이파리 하나하나가 눈을 크게 뜨고 왜, 라 묻는다. 스산한 언덕에 저녁 등이 하나, 둘 켜진다. 해가 죽어간다. 가장 불분명한 시간이다.
클림트의 녹색에 보랏빛으로 떨리는 쉴레의 어스름을 겹쳐본다. 고요한 세계와 흔들리는 세계, 찬란한 현상과 눈부신 결핍, 비밀의 방과 어떤 사랑을 나란히 놓아본다. 그들은 빈에 있었다. 훨씬 큰 그림의 일부로써. 빛이 떨어져내리는 이 도시에 스테인드글라스가 되어 서로 곁에 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