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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서아빠 Apr 02. 2024

연문위키 - 15편. 너의 이름은?①

1) 이름의 역사




"Pneumonoultramicroscopicsilicovolcanoconiosis
(뉴모노울트라마이크로스코픽실리코볼케이노코니오시스)"


혹시 이 이름을 아시나요? 아무렇게나 막 쓴 장난 같지만, 폐질환의 한 종류로 규성 진폐증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이지요. 몇 번을 봐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이름을 정하지 않으면 규성 진폐증을 이야기할 때 훨씬 더 어려웠을 거예요.


'이름'은 어떤 대상을 다른 것과 구별하고자 사람, 사물, 현상 등에 붙여 대표하게 하는 말입니다. 다른 것과 구분하기 위해 고유한 이름이 필요한 거죠. 그러니 우리는 모두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름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동식물이나 물건에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 친밀함을 표시하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시인의 '꽃' 중에서


'이름'이란 단어는 '이름을 짓다'의 옛말인 '잃다'에서 왔어요. 잃다의 명사형인 '일훔/일홈'이 바뀌어 '이름'이 되었죠. '~을 지칭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일컫다'도 이름과 같은 어원에서 온 거예요. 특히 우리 선조들은 이름을 너무 귀하게 여겨 이름을 '일컫는' 말도 다양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불렀어요. 먼저 이름의 한자어는 성명(姓名)입니다(정확히는 명(名)). 그리고 성명을 높여 부르는 말로 성함(姓銜)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높여 부를 때는 존함(尊銜), 함자(銜字)라고 하고,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존귀한 성과 어마어마한 이름이라는 뜻으로 존성대명(尊姓大名)이라고도 합니다.  


성함(姓銜), 존함(尊銜), 함자(銜字)
이름을 높여부를 때 쓰는 말 중에 재갈 함(銜)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재갈은 말의 입에 물리어 말을 다루기 위한 막대, 또는 소리를 내거나 말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의 입에 물리는 물건을 의미합니다. 이름을 높여 부르기 위해 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재갈'을 사용했다는 게 흥미롭죠?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했어요. 이름이란 귀하고 공경해야 할 것이니 함부로 부르다가 실수할까 봐 그런 거죠. 그래서 이름보다는 태명, 아명, 호, 자, 별명 등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자'나 '맹자'도 진짜 이름은 따로 있어요. 공자의 원래 이름은 '공구', 맹자는 '맹가'이지만 스승이란 의미의 부자(夫子)의 줄임말인 자(子)를 사용하는 거예요.


또한, 이름은 한자로 명(名)인데, 名은 夕(저녁 석) 자와 口(입 구) 자가 합쳐진 회의자입니다. 저녁이 되면 깜깜 서로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끼리 부르는 것이 '이름'이라는 그럴듯한 설명도 있어요.

※ 회의자(會意字) : 뜻과 뜻끼리 합쳐서 만든 글자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쉴 휴(休)는 사람人 이 나무木에 기대서 쉬는 것을 의미하는 회의자입니다.

이와 달리 이미 있는 글자 A의 뜻 + 글자 B의 소리를 합쳐 만든 형성자(形聲字)도 있어요. 형성자의 예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水)와 양이라는 소리를 가진 글자(羊)를 합쳐 새롭게 만들어진 큰 바다(양, 洋)가 있어요. 오늘날의 대부분의 한자는 형성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서도 이름을 남깁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이름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겼어요. 어쩌면 '나'보다 내 '이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도 몰라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처럼 이름은 사람이 죽어서도 오랫동안 남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누군가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이름을 이야기합니다. '이름값도 못한다.', '명성에 먹칠한다'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요. 아예 이름이 없는 경우에는 잡초, 잡학 등과 같이 '잡-'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잡놈 '이라는 비속어는 이름도 없을 정도로 천한 계급의 사람을 의미하는 거예요.


아예 '이름' '그 사람'과 동일하게 의미하는 단어들도 많아요. 문서로 누군가의 권한과 책임을 기재할 때도 '인의(人義)'가 아니라 '명의(名義)'라고 해요.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이름도 성도 모른다"라고 하고, 막연하게 사람을 찾아야 할 때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다"라고 하는 것도 그 사람의 정체를 모르는 것과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같은 표현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에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때는 "그 사람 이름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니?"라고도 하죠. 단지 이름을 함부로 부른 것에 불과한 행동이지만, 마치 그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으로 생각해요. 심지어 우리는 사람의 수를 헤아릴 때도 '이름'을 씁니다. 한 명, 두 명...  이름이란 그만큼 특별하고, 중요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나'를 드러내는 물건에게 '나'를 대표하는 '이름(명)'을 사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거예요. 예를 들어 명찰, 명패, 명함, 방명록 등이 있어요. 익명이나 제명처럼 나를 숨기는 말도 있어요. 서로 인사를 할 때도 통성명(通姓名)한다고 합니다. 성과 이름을 알려주는 거죠.

※ 익명(匿名(숨을(익), anonymous)은 반대로 나를 숨기는 것이고,
    제명(除名(덜(제), expulsion)은 어떤 구성원의 명단에서 나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을 '지명(指名, nomination/designation)'이라고 해요. 야구에서도 지명(된) 타자가 있지요.

지명타자 ((指名打者, Designated Hitter, DH)

지명타자의 뜻은 지명된 타자, 즉 특정한 사람이라고 정해진 타자를 말합니다. 원래 야구에서는 9명의 선수가 공격과 수비를 모두 하는 것이 원칙이었어요. 그러니 투수들도 공격 시에 타격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화끈한 타격전을 원하는 관중들이 좋아하지 않고, 투수들의 부상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에 1973년, 투수를 대신할 타자가 경기를 뛰는 지명타자 제도가 신설되었어요. 그래서 사전에 '지명'된 타자를 투수 대신 타석에 들어갈 타자로 한다는 의미로 지명타자라고 부르는 거예요.

아직도 이 제도는 찬반 의견이 갈리기도 해요. 하지만 메이저리그(Major League Baseball, MLB)의 아메리칸 리그(American League, AL)나 우리나라의 한국야구위원회(Korea Baseball Organization, KBO)에서는 지명타자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내셔널리그는 여전히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정통을 유지하고 있어요.




이름은 나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유명하다 즉, '이름이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는 의미가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명성, 명예, 부귀공명과 같은 단어에도 이름(명)이 들어가는 것도 그만큼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받는 경우에도 이름이 사용됩니다. 오명, 누명, 불명예 등의 단어들이 있어요.

※ 명예(名譽(기릴(예)), honor) : 기릴 정도의 이름
    명성(名聲(소리(성), Fame) :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이름,
    부귀공명 (富貴功名) : 부귀와 공명을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부귀는 재물이 많고 높은 지위를 의미하고, 공명은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친다는 말이에요.


※ 누명(陋名(더러울(누)) : (잘못 알려진 사실로) 더럽혀진 이름이란 말로써, 사실이 아닌 일로 억울하게 뒤집어쓴 불명예나 평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누명이란 단어 자체에 누명을 쓴 사람이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오명 : (실제로 잘못하여) 더럽혀진 이름이란 말입니다. 누명과 달리 오명은 확실하게 어떤 잘못을 저질러 이름이나 명예를 더럽힌 것을 말합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람을 유명인(有名人, celebrity)이라고 하는 이유도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는 뜻입니다. 물론 좋지 않은 일로 유명해진 경우도 있을 거예요. 요즘에는 셀럽이라고 한다죠? 비슷한 말로 저명(著(나타날(저))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게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겠죠.


명절, 명가, 명곡, 명문, 명사수, 명소, 명작, 명품과 같은 단어들도(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뛰어난, 중요한, 유명한 OO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이름과 관련된 사자성어도 많습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요. 명성이나 명예가 헛되이 퍼진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유명한 사람은 그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명실상부(名實相符)는 이름과 실제 생활이 서로 맞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만 높거나, 사람들의 기대만 높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만큼의 실력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지요. 입신양명(立身揚名)은 몸을 바로 세우고, 이름을 날리다는 의미로 후세에 이름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표현입니다. 자주 쓰는 말로 '구관이 명관이다. '라는 말있어요. '예전 관리가 별로인 줄 알았는데, 새로 바뀐 관리와 비교해 보니 아주 인정해 줄 만한 관리였구나'라고 후회하는 의미이지요.

입신양명 (立身揚名)
 
사실 입신양명이라는 사자성어는 없는 말입니다. 동아시아의 가장 근본 정치 개념인 효(孝)를 바탕으로 하는 효경(孝經)에 나오는 글의 일부를 합친 조어이지요. 원글의 내용은 유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효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 : 사람의 신체와 머리카락과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불감훼상 효지시야 :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입신행도 양명이 후세 :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서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이현부모 효지종아 : 부모님을 드러내드리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다.

여기에서 [입신양명 : 몸을 바로 세우고, 이름을 날리다] 사자성어가 나왔어요.

                                                   



명분은 항상 중요하다.

원래 뜻과 오늘날 쓰는 뜻이 조금 다른 단어도 있어요. 바로 '명분(名分)'입니다. 직역하면 '이름과 신분'인데, 유교 사상이 지배했던 시대에 사람의 이름이나 신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당성을 의미했어요. 그러니 원래의 뜻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유명한 사람이 가진 정당성이란 뜻이죠.


예전에는 군주와 신하 / 부모와 자식 / 선비와 백성 등 각 계층(이름과 신분)에서 지켜야 할 도리로써, 자기에게 주어진 분수를 지키며 떳떳하게 사는 것(대의명분)을 최고의 미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그러니 명분이 낮은 (이름과 신분이 낮은, 하층민) 사람이 명분이 높은(이름과 신분이 높은, 양반)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명분'이었던 거예요. 그러니 '명분이 없다'라는 말은 '이름이나 신분이 높지 않으면 깝치지 말아라'라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표면상의 이유나 구실로 더 많이 쓰입니다.


우리에게 이름만큼이나 중요한 명칭이 있지요. 바로 '성씨(姓氏)'입니다. 다음 편에는 성과 씨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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