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姓氏)는 '가족' 또는 '조상과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입니다. 아주 예전에는 성(姓)과 씨(氏)를 구분하였어요. 춘추전국시대를 지나면서 성은 여자가, 씨는 남자가 물려받는 것으로 변했다가 언젠가부터 성과 씨를 구분하지 않게 됩니다. 지금도 거의 구분하지 않지요.
성씨는 자신이 속한 가족의 역사와 같으니 어느 나라에서나 귀하게 여기지요. 중국에서도 성씨는 매우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중에서도 권세 있는 (그래서 유명한 성을 가진) 집안을 세가라고 불렀지요. 무협지 좀 보신 분들에게는 매우 익숙할 황보세가, 모용세가, 남궁세가, 제갈세가 같은 세가밀이에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혼신신고를 할 때 이름 다음에 '본'과 '등록기준지(본적)'를 쓰도록 되어 있어요. 그것도 한자로 쓰게 되어 있지요. 혼인신고서를 작성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본적(本籍)
자신의 호적의 기준이 되는 주소입니다. 예전에는 대게 태어난 곳에서 자라고, 살았기 때문에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주소를 본적으로 여기고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는 곳을 옮기는 것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본적의 효능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씨본관별 인구 수 성씨에서 성(姓)은 혈통의 연원(혈연)을 의미하며, 씨(氏)는 동일한 혈통(성)을 가진 사람들이 각지에 분산되어 있을 때 그 일파(지연)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실, 혈연/지연은 같은 가문을 말하는 거지요. 우리가 혼인신고서에 작성해야 할 '본(本)'은 본관(本貫), 즉 씨(氏)를 의미합니다. 본관은 대게 가문의 시조가 난 곳 또는 '성'이 생겨난 지역을 나타내기 때문에 '지역명'으로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예전에는 성이 없던 사람이 공을 세우거나 좋은 일을 해서 성을 새롭게 하사 받으면서 그 출신지를 본관으로 정하기도 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그리고 널리 알려진 본관으로는 '경주 김 씨', 밀양 박 씨, '전주 이 씨', '진주 강 씨' 등이 있습니다.
2024년 4월 프로야구 한 경기 등장한 선수 전원이 '김 씨'이다.
우리가 흔히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부르는 '백성(百姓)'도 100가지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천성도 아니고 만성도 아니고 고작 백성일 정도로 우리는 성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전체 성씨의 10%가 안 되는 성씨들이 전체 인구의 3/4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지요. 김 씨는 무려 전 국민의 20%라고 하니 성으로만 구분하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이~ 김 씨!'라고 부르면 20%는 뒤돌아본다는 건데, 많긴 하네요. 그러니 프로야구에 등장하는 선수가 전원 같은 성인 경우도 있어요.
지난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서양에서는 가문의 이름(씨)을 '직업', '주변지형', '생김새', '종교'와 관련된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고, 필요할 때 자신의 가족 이름(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성씨가 엄청나게 많았어요. 성씨만으로도 사람 구분이 가능할 정도이지요. 영국에서만 성이 45,000개 이상된다고 해요. 그래서 사람을 이름 대신 성씨로 부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서양에서는 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서양에서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성과 이름을 붙여서 함께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본인도 살면서 자기 풀네임을 쓰는 경험이 몇 번 없을 거예요. 공적인 문서에 적힌 것이 아니면 거의 볼 일도 없죠. 그래서 어떤 사람을 성씨로 부르냐 이름으로 부르냐가 친밀도나 심리적인 거리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요. 공적인 자리나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는 성으로 부르지만, 절친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가 되어야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친해진 사람에게만 이름 부르는 걸 허락하지요. 이런 현상도 성보다는 이름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친한 외국 친구에게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르면 깜짝 놀랄지도 몰라요.
카카는 평생 '카카'로 불린다. 이름 대신 애칭으로 평생 불리는 경우도 많지요. 2000년대 브라질의 미남 축구선수로 유명한 '카카(Kaka)'의 원래 이름은 '히카르두 이젝송 두스 산투스 레이치(Ricardo Izecson dos Santos Leite)'입니다. 하지만 축구 유니폼에는 kaka라고 되어 있지요. 카카의 동생인 지강이 어릴 때 원래 이름인 '히카루두'를 발음하지 못해 카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별칭이 된 거예요.
이렇게 성이나 이름을 줄여 부르거나, 다르게 부르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 소프트의 창립자인 빌 게이츠나 전직 미국 대통령인 빌 클린턴의 Bill 은 William의 줄임말이에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Alex (Alexander) , Chris (Christopher), Rob(Robert), Ed(Edward), Mike(Michael), Joe(Joseph), Dan 또는 Danny(Daniel)의 줄임말이죠. 여자 이름으로 주로 쓰이는 Meg(Margaret), Kate(Katherine), Liz(Elizabeth)도 줄임말이에요. 우리도 집안에 따라 이름의 끝자만 부르고 하잖아요?
특히 서양에서는 가족의 범위를 조상이나 혈연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여자가 혼인을 하면 성씨마저 (주로 가장인) 남편의 것을 따르지요. 2016년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실제 서양에서 결혼할 때 성을 바꾸는 것은 의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국 여성의 70%, 영국 여성의 90%가 결혼 후 성을 바꾼다고 해요.
성을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도 불편한 일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지갑만 잃어버려도 얼마나 귀찮은 일이 많나요? 운전면허증, 여권 같은 주요 신분증도 모두 바꿔야 하지요. 신용카드, 은행계좌, 보험도 명의변경 해야 됩니다. 게다가 서양은 우리나라보다 디지털로 처리되는 일도 적고, 시간도 많이 걸리니 불편함이 더 크겠죠. 물론 재발급 비용도 무시 못할 테고요.
만약, 결혼을 앞둔 여성이 책을 쓰는 작가이거나, 논문을 작성한 저자라면 더 문제가 되지요. 보통 저자명으로 검색을 하는데, 성이 바뀌면 검색하기도 어려워질 거예요. 거기다 이혼 후에 재혼하여 성이 또 바뀐다면?? 생각만 해도 짜증 날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 이유로 전 남편의 성을 계속 쓰는 경우도 있지요. 독일 총리였던 앙겔라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도 원래 쓰던 '카스너(Kasner)'가 아닌, 전 남편의 성인 '메르켈'을 여전히 사용 중이에요. 메르켈은 물리학 박사 출신으로 여러 논문을 썼는데, 논문 검색에 문제가 생기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요. 마찬가지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의 딸인 이반카 트럼프(Ivana “Ivanka” Marie Trump는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와 결혼했는데, 여전히 트럼프 성씨를 유지하고 있어요. 아마 정치인으로서 이미지이자 브랜드가 되는 이름을 유지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본 것 아닐까요?
그런데 이상하죠? 남편의 성을 따르는 건 전통적 관점에서 남성 우월 사상의 핵심인데, 더 개인주의적이고 성평등을 추구하는 사회가 됐음에도 서양에서는 왜 반발이 없을까요? 특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하는 서른 살 이하 여성이 60%가 넘는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어떻게 서양에서는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되었을까요?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풍습은 대략 16세기부터 시작되었어요. 당시 인권 영역에서 취약했던 여성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성을 가지게 된 것은 18세기 무렵이지요. 특히, 18세기부터는 남편과 성이 다른 미망인은 가문의 재산 상속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편 성 따르기가 완전히 정착되게 됩니다. 대항해 시대 이후에 전 세계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면서 이 관습이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죠.
물론 유럽 중에서도 그리스와 스페인 그리고 칠레처럼 스페인 언어권의 국가들 중에는 부부가 각자의 성을 유지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에선 1983년 여성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성을 평생 유지해야 한다는 법률이 제정되었죠.
이렇게 정착된 관습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어요. 성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죠. 게다가 오랜 시간 동안 '좋은 가정'을 꾸린다는 것의 범위에 남편의 성을 따르는 일종의 헌신이 포함되며, 남편의 성을 따르는 행위가 엄마와 (미래의) 자녀를 하나로 묶는 매개가 된다는 믿음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성이 다르면 자녀들이 가족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여성이 성을 바꾸는 것에 대해 큰 반발 없이 받아들인다고 해요.
또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생각하는 '결혼 패키지'에 '남자가 하는 프러포즈'나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신부를 신랑에게 넘겨주는 일'과 함께 '결혼 후 성을 바꾸는 행위'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해요. 게다가 이를 로맨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요. 물론 그냥 전통이기 때문에 따르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다나카'란 성은 밭 가운데 살던 사람이란 뜻이다. 비교적 서양 문물을 일찍 접한 일본도 사정은 서양과 비슷해요. 일본은 1875년 메이지 유신 때 롤모델이었던 영국을 모방하여 모든 사람이 성을 갖도록 의무화했어요. 유럽과 비슷하게 '살던 동네의 특징이나 위치'를 기반으로 만들었죠. 산 아래서 살던 사람들은 야마시타(山下)가 되고, 밭 한가운데에 살던 사람들은 '다나카(田中)'가 되는 식이었죠.
그래서 일본에서 성이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어요. 현재는 일본의 성은 무려 123,000개 정도가 된다고 하니 엄청 많지요. 지명으로 성을 만들다 보니, 일본의 웬만한 지역은 다 성으로 존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산(가마야마), 목포(기우라)와 같은 우리나라 지명도 있어요. 심지어 독도(도쿠시마)도 있다고 해요.
서양과 비슷한 이유로 일본에서도 성은 그리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결혼한 여성의 96%가 남편의 성을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1898년 제정된 부부의 성은 하나여야 한다는 부부동성제 규정 때문이지요. 아마 성을 바꿀 것을 강제하는 거의 유일한 국가일 거예요. 심지어 2015년과 2021년 부부동성제 규정이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합헌으로 결정을 내렸지요. 이때의 말이 참 어이가 없는데, “부부가 다른 성을 쓰면 정이 없어진다”며 재판관 15명 중 11명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고 해요.
그럼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나라는 성과 이름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유일한 국가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