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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수 Sep 21. 2020

시간을 낭비하는 법

내 인생의 목표

토요일 오후 4 시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 20대 초반에 즐겨 들었던 Velvet Underground & Nico의 Super delux 앨범을 들으며 가만히 누워있다.


서늘하게 부는 바람 덕에 창문의 블라인드가 기분 좋게 흔들린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몇 줄기가 예쁘다,라고 생각하는 찰나, 알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한다.


왜지? 무언가를 해야 되는데 하지 않고 있는 기분이다. 머릿속에서 리스트를 작성해 본다. 특별히 오늘 끝내야 할 일은 없다. 충분히 다음 주 근무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다. 특별히 할 일은 없으니 책을 읽거나 운동을 하거나 피아노 연습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이런 기분이 들어 딱히 실행에 옮겨본 적은 없다. 그냥 그렇게 생각만 한다. 몸은 해파리처럼 축 늘어져 있는데도 마음은 죄책감에 편하지가 않다. 이러니까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다.


"고전을 읽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마음에 사둔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들이 새 책 그대로 내 책장에 꽂혀있고, 이걸 입으면 한혜진 언니 마냥 운동할 것 같아 사 둔 룰루 레몬의 운동복들도 몇 번 입혀보지 못한 채로 내 옷장에 차곡차곡 잘 쌓여있다.


주중에 일을 했고, 이제는 주말이라 쉬어도 된다. 그래서 쉬어 보겠다고 꾸역꾸역 어제 한국에서 방영된 <나 혼자 산다>도 다운로드하여서 봤고, 친구들과 얘기도 좀 했다. 그런데도 휴식을 한 느낌은커녕, 가슴 한편이 괜스레 무겁다.


한국인들은 발전하고 있지 않은 자신에게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쉬러 간 여행을 가서도 뭘 "느껴야 하고" "배워와야" 하는 사람들이다. 퇴근을 하고도 자기 계발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며, 취미 생활도 수강까지 해가며 전문가처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처음 호주에 와서 놀라웠던 것이 있다. 이게 영미권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하면 할 특징인데, 자기는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며 세 마디 정도를 한다. 그들은 "난 피아노를 좀 쳐"라고 말하며 내가 8살 때나 쳤던 곡을 아주 자랑스럽게 친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좋아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 "피아노를 좀 친다"라고 말할 정도면 "음대 갈 뻔했던" 실력은 되어야 하며, 영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 있게 나는 영어를 잘한다고 했다간, 트집 잡히기 십상이다.


자기 관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들은 피부도 적당히 윤기 나는 걸로는 성에 안 차 결점 없이 깨끗해야 하며, 몸매도 적당히 건강하면 되는 게 아니라, 날씬 하다못해 말라야 한다, 단, 볼륨도 있으면서. 자신에 있어서도, 타인에 있어서도 이상적인 잣대를 끊임없이 들이댄다. 그리고 이상적인 잣대에 부합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그런 한국인들에게 나는 엄청나게 게으르고, 자기 관리를 못하며, 인생을 대충 사는 그런 사람이다. 그런 나도 사실은 한국인인지라 속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든다. 그런데 나는 사실 더 부지런 해지고 싶지도 않고, 자기 관리를 끝내주게 할 독기도 없다. 나는 나에게 완벽주의자 이런 명칭이 따라오는 것도 싫다.


나는 시간을 더 잘 낭비하고 싶다. 더 잘 쉬고 싶다. 차를 마시면, 진짜 그 차 향에 집중하고 싶고, 밖에서 새가 울면 새소리에 온전히 귀 기울이고 싶다. 하늘이 예쁘면 이걸 소셜미디어에 예쁘게 찍어 올려야겠다는 생각 보단 그 하늘의 미세한 색의 변화를 더 마음에 담고 싶다. 피아노를 쳐도 "언젠가는 쇼팽의 발라드를 꼭 치고 말 거야"가 아니라, 쉬운 곡을 쳐도 그 음의 아름다움을 진짜로 듣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머릿속의 잡음 없이 일상의 경험을 온전히 만끽하는 순간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오늘보다 내일, 더 괜찮은 내가 안 되더라도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가만히 있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목표라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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