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 하다가 취미를 잃어버린 크리에이터
2022년 4월, 코로나 이후 첫 해외여행으로 방콕행 티켓을 예매했다. 오랜만의 여행 준비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어렵다기보다는 굉장히 번거로웠다고 할까. 비행기, 호텔을 예약하고 어디 갈지 여행 동선을 미리 짜는 것뿐만 아니라 검역에 필요한 코로나 백신 증명서 및 입국 서류도 준비해야 했다. 또,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정된 호텔 픽업 차량에 탑승해 호텔 내에서 PCR 검사를 하고 12시간 동안 음성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세미 격리를 했다(지금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런 고생해서까지 갔어야 했나 싶기도 하다) 그 이후로도 또 한 번의 방콕 출국, 두 번의 일본 여행, 한 번의 말레이시아 여행, 그리고 최근 필리핀 2 주살이, 한 번의 부모님과의 생애 첫 해외여행을 베트남으로 다녀왔다. 그리고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아, 나 더 이상 해외여행이 그리 설레지 않구나?”
다소 당황스러운 변화였다. 외국에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해외 출장길도 설렜고, 젊을 때 경험에 투자하자는 마인드였기에 개인적으로 해외여행도 많이 다녔다. 코로나로 하늘 길이 끊겼던 2년 동안 그토록 바라던 해외여행을 하고 있는데 왜 예전처럼 설레지 않는 걸까? 스스로도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어 계속 이유를 생각해 봤다. 내가 찾은 답은, 여행이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프리랜서의 가장 큰 장점은 남들 일할 때 놀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행기 티켓이나 호텔도 비교적 저렴한 평일에 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좀 더 싸게 갈 수 있었지만 그에 따라오는 부작용도 있었다. 일단 평일이라 업무 메일, 연락들이 수시로 치고 들어온다. 회사라면 ‘휴가 중입니다. ㅇㅇ대리님에게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자동 응답 메일이라도 걸어놓을 텐데, 혼자 일하기 때문에 나를 대신해 연락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또 성격상 ‘휴가 끝나고 해야지’가 안 되는 편이라 업무 연락이 오면 호텔 방이든 식당에서든 노트북을 켜고 메일 답장을 썼다. <말이 좋아 디지털노마드>에서 말했듯, 디지털 노마드는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어디에 있든 일을 해야만 하는 부작용이 있어서 때로는 여행을 괜히 왔나 싶은 순간도 있었다.
또, 콘텐츠에 대한 강박도 있다. 이건 내가 콘텐츠 크리에이터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여행만큼 좋은 콘텐츠 소재가 어디 있을까. 매일 집에서만 영상 찍다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이템들로 찍을 수 있는데! 해외여행이 잡히면 여행 일정과 동시에 머릿속에선 곧바로 콘텐츠 기획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왕 여행을 간 김에 유튜브 브이로그를 찍을까, 세로형 숏폼을 찍을까? 여행 브이로그, 그냥 찍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브이로그 찍겠다고 다짐을 한 순간 여행은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중간중간 피곤해도 카메라에 대고 주절주절 말도 해야 하고 가는 곳마다 물건이나 풍경 등 인서트 컷들을 하나하나 다 담아야 한다. ‘뭘 그렇게까지… 그냥 폰으로 가는 곳마다 짧게 찍으면 안 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찍고 싶지 않을 때도 찍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내가 여행을 온 건지, 일을 하고 있는 건지 현타가 올 때가 있다. 나중에 정보 포스팅을 하려면 가는 곳마다 구글 맵스 체크, 음식점의 메뉴와 가격 등을 다 기록해 두어야 하고. 무엇보다, ‘유튜버’하면 떠오르는, 길거리에서 고프로나 스마트폰을 들고 혼자 말하며 돌아다니는 게 힘들었다. 여행 유튜버들.. 정말 리스펙 한다.
인스타그램 릴스는 좀 쉽지 않냐고? 숏폼 콘텐츠를 찍는다고 마음먹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찍을지 레퍼런스부터 열심히 뒤져야 한다. 여행지이기 때문에 변수도 많고 재방문이 어려워서 한번 간 김에 잘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뷰티 콘텐츠 만들 때보다 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리고 유튜브는 편집자 분이 계시지만 숏폼의 경우 편집도 내가 직접 하기 때문에 시간도 꽤나 잡아먹는다. 편집하면 끝이냐고? 영상 올리기 전 멘션도 뭐라고 쓸지 고민해야 한다. 한마디로 여행 한번 다녀오면 일이 더 많아져서 더 피곤해졌다. 심지어 더 억울한 건 누가 시킨 적도 없다. 여행을 셀프로 이렇게나 피곤하게 하는 나 자신한테 좀 질리다 보니 이럴 거면 여행 안 가! 싶더라.
20대 때, 좁은 원룸에서 출퇴근하던 시절에는 해외 출장을 사랑했다. 출장 가면 일단 넓은 호텔방에서 잘 수 있었고 일정이 끝나면 회식도 하고, 맛있는 현지식도 먹을 수 있었으니까. 뭣보다 내가 뭐라도 된듯한 호사를 누리는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함께 일하는 팀원 중 한 사람은 유독 해외 출장을 피곤해하고 일정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당시에는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내 돈 주고 가기 힘든 해외를 출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시간이 흘러, 나도 어느덧 30대 중반. 연고 없는 수도권에 내가 편히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생겼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가’족’ 같은 반려견도 있다 보니 이제는 내 집을 오래 비우는 게 그리 달갑지만은 않더라. 그리고 굳이 애매한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옮겨 다니기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넷플릭스 보는 게 좋아졌다. 사실 제일 신경 쓰이는 건 반려견 로이의 존재다. 반려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공감할 텐데, 여행을 좋아하는 밖돌이들이 반려 동물과 함께 지내고 있다면 여행 경비에서 반려 동물 케어비(호텔링 혹은 방문탁묘 등)도 비행기 값 정도 추가해야 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로이한테도 미안해서 자발적으로 발이 묶이게 된 것도 있다.
‘이럴 거면 그냥 집에서 넷플릭스 볼 걸!’ 여행 가서 일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질려서 현타가 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내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얼마 전 사회생활 8년 만에 부모님을 모시고 베트남 다낭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솔직히 순간순간 가족끼리 사소한 말다툼이 생길 뻔도 했었고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케어를 해야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도 힘든 순간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 통장 잔고도 여행 다녀오고 힘들어졌다..^^ 하지만 부모님이 한국에 돌아와 매일같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반복해서 보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 여행이란 게 참 그런 것 같다. 편안한 집을 떠나 낯선 환경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 모든 불편함을 기꺼이 겪겠다고 자처하는 게 돈 낭비일지도, 누군가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좋은 순간도, 힘들었던 순간도 다 추억이자 경험이 된다는 걸 배웠다. 새로운 풍경을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할 때 오는 행복은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쉽게 찾아오지 않으니까. 그리고 중요한 건 그 경험들은 휘발되지 않고 내 어딘가에 잘 쌓여있을 것이다.
다낭에서 찍은 가족사진에 어떤 외국인이 남긴 댓글이 인상적이었다. ’ 돈은 회수되지만 시간은 회수되지 않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투자입니까’ 현명한 투자자인 나는 그래서 또 여행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