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해져야 해

40대에 뭔가를 시작한다는 건

by hosu네

시아버지께서는 우리 아빠와 나이가 비슷하시다. 70대 중반이신데, 여전히 테니스를 치신다. 좀 늦게 입문하셨다고 들었다. 내가 관심 없었을 때에야 건강하시구나-하고 끝났던 생각이, 이제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하니 '대단하시다'로 바뀌었다. 어머니께서는 극렬하게 돈을 아끼시는 분이었으니 본인의 취미를 위해 뭐 그리 많이 투자하셨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시아버지께서는 소위 '쪼들리는'걸 싫어하시는 분이다. 없어 보이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라는 말이다. 그런 분이 제대로 된 레슨을 받으신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좋아하는 걸 해나가셨다는 것이 참 대단하시다 할 수 있지 않은가.


한 달 전쯤 식사자리에서 테니스 배우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럼 이번 주 토요일 오전에 우리 클럽에 와 봐. 공홈 쳐줄게."

"어, 정말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이 사람아. 아버지가 잘은 못 쳐도 공은 일등으로 넘겨준다."


그렇게 토요일 약속을 잡아놓았는데, 이상하게도 매주 토요일마다 비소식이 있었다. 아버지의 클럽은 야외인 데다가 클레이 코트이기 때문에 비가 오면 아무래도 하기가 힘들다. 심지어 나는 문자 그대로의 '밖'에서는 한 번도 쳐보지 않았다. 아쉽게 한 주 한 주가 가던 어느 날, 드디어 비가 오지 않는 토요일. 나와 남편은 같이 아버지 클럽으로 갔다. 해가 쨍쨍한 그곳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태린이 중에서도 개 태린이인 나에게 아버지는 일단 해보라고 하시며, 공을 정말 열심히 날려주셨다. 코치 선생님과 했을 때랑은 정말 달랐다. 공은 방향도 높이도 올 때마다 제각각이어서, 위치도 잘 못 잡는 나는 죽어라고 뛰어야 했다. 그나마 나보다 잘 치는 남편은 어느 정도 적응해서 넘기기도 했지만, 나는 뭐 그냥 어디 유격훈련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뛰어야 했다.

"아버지 잠시만요! 너무 힘들어서 마시고 올게요!"

진짜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다가 손을 들고 항복을 외쳤다.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께서는 남편보다는 내게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는지-물론 그건 사실이다-남편보고는 옆에 가서 자세 연습 하라고 하시고 나에게만 공을 던져주시고 있는 상태였다. 조금은 아쉬우신 듯 고개를 끄덕이시고, 아버지께서는 이제 남편에게 공을 던져 주셨다. 어떻게 저렇게 쉬지 않고 하시지? 우리 아빠도 체력이 좋은 편이지만 무릎도 안 좋고 하다 보니 이제 격한 운동은 잘하지 못하는데, 시아버지께서 하시는 걸 보니 멋지시다는 생각도 들었다.


" 며느리, 실력이 늘라면, 뻔뻔해져야 한다."

잠시 쉬자고 들어온 컨테이너 안에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 이 운동이 되게 치사해. 잘 못하면 쳐주지도 않아. 그런데 누가 쳐줄게 이리 와보라고 하면, 무조건 감사하다고 가서 치는 거야."

"그런데 저는 뭐 실력도 그렇고, 남들한테 민폐만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돼. 다들 민폐인 시절이 있어. 나중에 후배가 왔을 때 못되게 안 하면 되는 거야. 지금은 뻔뻔하게 열심히 나가."

아버지의 말씀에 조금은 답답했던 마음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부족한데, 레슨 외에 나가서 하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면서, 이제는 내가 뭘 배울지 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에는 학교에서, 부모님이 하라는 걸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내가 돈을 내면 뭔가를 배울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래 뭘 한 게 있나 싶다.

영어 회화를 할 때면 내가 '잘하는'반에 들어가고 싶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이유는 어렸을 때 배웠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걸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흥미가 생겨서 시작한 뭔가가 어려워지면 바로 그만두었다. 뒤쳐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선 무언가를 배울 때는 배움이 느릴 수 있다. 계속 뒤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만 소외된 것 같고, 갑자기 재미가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만둬 버리면 더 이상 나에게 발전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인풋을 했다고 해서 아웃풋이 비례해서 나오지 않는다. 발전은 항상 갑자기 찾아온다. 꾸준히 무언가를 하면 어느 순간 조금, 또 한 발짝 나아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뒤쳐지는 게 싫다고 내가 만날 그 순간을 포기한다면 얼마나 아쉬운가.


이제 아버지의 그 말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며느리, 뻔뻔해져야 돼. 낯 뜨거울 때마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기억하고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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