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호 May 07. 2024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땀이 그렇게 날 수가 없었다. 땡볕에 군장을 메고 걸었다. 건빵주머니에 있던 담배까지 흠뻑 젖어, 담배를 꺼내면 필터만 빠졌다. 일과가 그랬다. 군장을 안 메고 걸어도 한 여름에 진지까지 걸어가면 군복이 장대비 맞은 것 마냥 젖었다. 소대 내무반, 잠시 동안은 내 집었던 그곳은 들어가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계급이 낮았던 나에게는 언제나 숨막히는 공간이었다. 자유공간은 고사하고 자유시간 조차도 없던 공간, . 아무도 나를 쳐다 보지 않아도, 말을 걸지 않았어도, 그 안에만 들어가면 숨이 턱하고 막혔다. 하지만 군생활이 힘들다고 느낀 적은 그날까지는 없었다. 상병 어느 여름, 군장 그리고 그 위에 기관총 그렇게 땡볕 밑을 걸어가던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반의 사내들이 20명 넘게 모여있던 그 공간은, 사람의 기분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공간은 아니었다


만약 내가 지금 집에 있다면? 지금은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니까, 아홉시에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하고 6시에 일과를 마무리 한다면? 그 일과시간을 공부에 쏟을 수 있다면? 지금 월급이 대략 2만원이니까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 먹고 월 용돈 2만원만 받고 집에서 공부만 한다면? 집에서 용돈 2만원 받고 아침 아홉시에 일어나 끼니 챙겨 먹고 여섯시까지 공부만 하다 여섯시 이후로 놀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런 생각이 들고나니 ‘아 나는 지금 고생을 하고 있는거구나.’ 라는 생각이 찾아왔다. 아니 현상황을 인지했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 날 그 평소와 같던 그 여름 어느 날, 뭔가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내 인생이 발전을 했으면 좋겠다. 뭔가 남이 시켜서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근데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평생을 학교가라면 학교가고, 밥 먹으라면 밥 먹고, 누가 놀자면 놀고, 어디 가자면 가고, 먹고 살아야 하니 돈벌어야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뭔가 목적을 가져보자는 생각을 했으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그러다 고등학교 시절, 해외를 떠돌고 여행하고 싶다는 말을 하던 내 자신이 떠 올랐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러고 싶었는지는 그 때도 지금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여름 뜨거운 날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날, 고등학생 시절, 야자시간에 친구들에게 지나가듯 한 마디 던지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언젠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면 해외 여행을 가자, 혼자서 가자. 가이드 없이 혼자서 세계여행을 하자. 결국 아직도 이루지 못 한 목표가 되었지만, 그 때는 그게 동기부여가 됐다. 그래서 영어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동기가 생겼다. 가이드없이 혼자 여행을 하려면 영어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나고 상병 생활이 무르익었을 무렵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휴게실에 있던 영어사전을 들고 왔다. 후임이 가져 온 영어 소설책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후임이 영어공부를 하겠다며 사온 영어 소설책을 보고 부탁을 했다. 곧 있으면 내 생일인데, 나도 영어공부를 하고 싶다. 그러니 그 책을 나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으면 좋겠다. 두 달 밖에 차이가 나지 않던 한 살 많은 후임은 선뜻 그 책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영어 소설책 한 권, 그리고 언제부터 거기 휴게실 책꽂이에 있어왔는지도 모를 영어사전 하나, 그리고 여섯시 이후 내가 영어 소설책을 펴 놓고 영어 단어를 찾아도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는 상황, 그렇게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내가 가진 시간을 나를 위해 쓰고 싶다, 미래를 위해 싶은 마음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