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이해해보며 걷기: 살롱과 브런치

관계와 경계, 그 사이에서

by 호수를 걷다




나는 관계와 시선이 교차하는 장(場) 속에서, 감각과 감정을 자기인식과 동일선에 두고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경험을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식화’와는 조금 다른 결이다.




18세기, 19세기 살롱 안에서도 사람들은 이 공간에서 어떤 사람으로 읽히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그 시절은 개인보다 집단이 더 중요했다. 말 한 마디, 웃음의 타이밍, 침묵의 방식, 앉는 자세까지도 존재 방식을 시연하는 장이었다.


지금의 세상은, 과거의 살롱이 알고리즘의 확장 속에서 수많은 집단으로 쪼개진 모습에 가깝다. 개인화가 가능해졌지만, 쪼개진 집단과 문화는 더 큰 목소리를 위해 ‘연대’와 ‘분열’이라는 극단의 언어를 드러낸다. 무엇이 잘못이라 할 것도 없고, 동시에 무엇도 잘못되지 않은 세상. 그러나 그런 세상일수록 상징을 요구하게 된다. 갈망보다 필요가 우선이 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절된 집단과 개인화된 알고리즘 속에서도 인간의 본질적 갈망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신경 안 써.’가 아니라 ‘신경 쓰이는 나를 본다.’라고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안의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씩 붙이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현장에서 수많은 마음의 결을 들어왔다. 박사과정에서 ‘심리적 회복’과 ‘삶의 결’을 붙잡고 연구하던 어느 시기, 형식 안에서만 마음을 구조화하는 일이 버거워졌다. 글의 내용을 읽어도 그 속을 바라보기 어려웠고, 시간은 멈춘 듯 느리게 흘렀다. 세상은 정돈되지 않은 얼굴로 다가왔고, 형식 속에서 나열된 글들은 나와 결이 달랐다. 압도감과 괴리감 속에서, 내가 설 수 있는 작은 땅조차 사라진 듯했다.
그 조그만 자리에 다시 서고 싶어, 연구를 멈추고 내면의 숲으로 들어갔다. 고요한 새벽, 잔잔한 호수 위를 걷듯, 감각을 되살리며 혼자와 함께, 그 사이의 경계를 걷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년간 논문 속에서 검열과 증명의 언어를 썼다. 숨이 막히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안에는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정해진 형식과 근거는 나를 지탱하는 울타리였다. 그래서인지, 확인 없이 글을 올릴 수 있는 브런치는 더 낯설고 더 두렵다. 숨이 막히지 않아도 되는 대신, 어떤 안정도 보장되지 않는 이 자리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익숙한 안정감에 머무를 것인지, 낯선 나를 향해 걸어갈 것인지. 지금 나는 그 선택의 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문을 여는 순간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안락한 방에서 시작하는 상담의 시간과 달리, 브런치에 첫 발을 내딛은 순간 나는 무수히 쏟아지는 글 속에서 스스로에게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내 첫 글에 시선을 주고 눈빛을 건네준 사람들이 있었다.


작가 승인을 받고, 조심스레 가족에게 소식을 전했다. 아직 글을 보이기 부끄러워 스토리북 제목은 알려주지 않았다. 동생과 오랜만에 식사를 하며 고민을 나누던 중, 동생이 한 브런치 스토리 글이 나일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 글의 작가명은 내게 라이킷을 눌러준 작가였다. 거대한 세상 속에서 연결고리를 발견한 순간, 나를 찾아주는 가족과, 나를 발견해주는 같은 결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지금, 고도로 개인화된 시선과 고도로 문명화된 감정 교류의 무도회장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 더 관계를 이해하고 싶다. 경계와 함께 걸어보고 싶다.


언젠가, 어느 오후 북적이는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다양한 사유를 나누는 장면을 그려본다. 다른 의견을 내는 목소리도 반갑다. 모든 의견이 그 거리에서 괜찮다고 느껴지는 순간, 내가 바라보는 렌즈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사유의 기쁨으로 다가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는 브런치를 살롱이 아닌 ‘숲’, 관계와 시선이 교차하는 장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숲에서, 나의 감각을 천천히 길러가려 한다.





우리, 이 숲을 함께 걸어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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