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만들며 걷기: 세상을 걷기

신념과 감각을 구분하기

by 호수를 걷다




우리 집 마당 앞에는 고양이들이 산다. 새끼 고양이들은 내 작은 움직임에도 도망가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머무는 발걸음에 함께 머물기 시작했다. 아직은 멀지만, 그 거리 안에는 묘한 리듬이 있다.


몇 년 전 한겨울, 집 앞 박스 안에 몸을 쉬고 있던 고양이가 있었다. 그 안에서 임신한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어미는 떠났지만, 새끼 고양이 한 마리는 사료를 먹으러 내려오다가 가끔 나와 마주쳤다. 어느 봄날, 동생이 그 아이를 품에 안았고 ‘순이’라는 이름을 불러주었다. 순이는 또 새끼를 낳았고, 그중 두 마리는 우리 집 앞에 머물기 시작했다.


태어나고, 죽고, 머무르고, 떠나가기를 반복하며 마당 앞은 서서히 고양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해를 거듭하며 그들은 내 삶의 결이 되었다. 그들을 바라볼 때면, 처음 마당에 머물다 간 길고양이를 바라보던 낯선 내 눈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두려움을 품은 채 나를 바라보는 새끼 고양이들의 눈빛과 마주한다. 의도치 않게 삶의 결을 공유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작년 여름을 함께 보낸, 몸단장이 취미인 멋쟁이 고양이가 있다. 내 발걸음이 곁에 멈춰도 여전히 몸단장에 열중한다. 엉덩이를 두드리면 뒹굴고, 기분 좋은 날이면 내 무릎에 몸을 기대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양방향적인 소통의 감각은 나를 따뜻하게 만든다.


반대로, 어떤 대상에게 보내는 일방적인 소통은 이런 경험을 어렵게 한다. 여기서의 소통은 언어가 아니라, 일방적인 시선과 연결된다. 그리고 지금의 세상은 그 시선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시대 안에 열려 있는 구조를 바라보고 생각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확증 편향적인 알고리즘 속에서, 현실을 잃을 수 있는 공간은 너무나 크다.




숨을 쉬고자, 밤 산책을 시작했다. 잠시 멈춰 계단 아래를 바라보면,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내 그림자를 선명하게 만든다. 나는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것들이 함께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내가 머물러야 할 곳을 생각해본다.


영화 인셉션의 멀(Mal)은 현실처럼 느껴지는 감각 속에서 혼란을 겪는다. 그의 남편은 그 감각을 한때 공유했지만, 결국 그것을 붙들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존재가 된다. 수많은 대화와 시선들을 마주하며, 나 역시 때로는 멀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 그림자 위로 여름 밤하늘이 펼쳐진다.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 그 옆에 있던 보이지 않던 별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내가 바라보았기에 비로소 들어온 것들이다. 시선을 조금만 옮기면 별 아래 나무가 있고, 그 멀리 하늘 아래 숲이 있다.


어쩌면 나는 회피하고 있는 걸까.


어두운 밤 아래, 빛은 변한다. 확신 속에 잠겨 있던 순간, 인기척이 들린다. 문 앞에 어미 고양이가 서 있다. 더운 여름, 새끼들을 데리고 마루 밑으로 들어간 어미 고양이는, 내 밤 산책 속으로 들어온다. 마치 내 시간을 알고 있는 듯, 자연스럽게 물을 마신다. 그리고 다시 새끼들을 찾아 마루 밑으로 사라진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내 그림자를 다시 바라본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들은 조금 달라져 있다.


나는 멀이 되지 않기로 했다.


융은 상징을 ‘자아의 분열을 연결해주는 다리’라고 했다. 나는 그 다리 위에 머물기보다, 그 아래를 흐르는 감각과도 함께 살아보고 싶었다. 구스타프 융이 “예술은 무의식의 상징적 표현이며, 인간의 자아 통합을 위한 핵심 경로”라고 보았듯, 함께 경험하는 시간, 살아내는 시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그럴 때 상징은 단지 의미에 갇히지 않고, 삶 속에서 쓰이며 살아날 수 있다. 상징은 감정을 숨기는 장막이 아니라, 삶을 이어주는 다리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별들을 잠시 외면해보기로 했다. 상징에 갇히기보다, 그 빛 아래의 어둠과 나무, 그리고 발 아래의 고양이들과 함께 살아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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