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관계, 큰 존재: 일상의 틈에서 언어를 짓다
"때때로, 너무 많은 걸 고민하다 보면 한 마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런 날들이 내게도 있다."
나는 아빠의 언어를 부정하지 않고, 엄마의 감각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의 감각을 방어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그 감각을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꺼내어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길은 너무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 그건 단지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언어로 바꾸는 데 필요한 시간과 자리의 문제이다. 감정은 나를 둘러싼 관계에서 비롯되기에, 나는 감정의 언어를 말하는 순간, 사회적 언어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공정함이나 생존, 혹은 연대 같은 가치들이 서로 부딪힌다.
그런 가치들이 충돌할 때마다, 나는 너무 많은 걸 고민하고 있는 것 같고, 때때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나는 공정하다는 착각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돈은 벌고 싶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과도 함께하고 싶다. 이 세 가지 마음은 때로 서로를 밀어내며, 나를 스스로 모순된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나는 정의로운 삶을 지향하지만, 생존을 외면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이들과의 연대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이 세 가지는 마치 서로를 밀어내며, 나를 복잡한 삼각구조 속에 세워놓는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 그 생각은 과거-현재-미래의 나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건 나의 존재에 스스로 틀을 만드는 작업 같다.
그런 질문들 속에 답답한 마음으로 집 앞을 한참 걸어본다.
그렇게 걷다 보면,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불완전함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 '하이-라이즈'나 '설국열차'처럼, 밑에서 위로, 뒤에서 앞으로 움직이는 걸 막을 수도, 바로 알 수도 없는 작은 존재다. 위를 바라보면 내가 작아지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내가 불편해진다.
그런 시선의 위치감 속에서, 세 가지 마음처럼 세 가지 존재 속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 어딘가에서 나는 말하지 못한 감정을 대신 느낀다. 정답지는 다양해졌지만, 그 속에서 나는 갈 길을 잃는다. '생존' 아니면 '결핍'이라는 말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에, 커다란 로고가 박힌 가방을 들고 일하고 싶지 않다. 세상은 선택할 수 없어서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그럴 때 떠오르는 문장 하나. "La véritable élégance ne parle pas(진짜 우아함은 말하지 않는다)." 때로는 말해지지 않는 섬세한 감각이 삶의 디테일과 아름다움을 더 잘 드러낸다. "A Birkin bag looks its best when it’s battered and broken in."이라고 말한 제인 버킨이 낡고 꾸깃한 가방을 들고 다닌 건, 그 자체로 삶의 디테일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낡고 꾸깃한 가방조차 명품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그것은 작고 섬세하게 세상을 걸었던 그녀의 이야기들 속에서 함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모든 것이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여전히 그 흐름에 휩쓸리듯 살아가고 있는 트루먼처럼. 그러면서도 나는, 그를 향해 진실을 전하려 했던 실비아처럼, 나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실비아가 트루먼에게 전하려던 삶의 진실처럼, 나 역시 이 작은 순간 속에서 진짜 삶의 감정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 정리하며 문 앞을 걷고 있는데, 직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대문 쪽으로 걸어오는 낯선 여성이 보인다. 조심스럽게 인사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오랫동안 우리 집에 찾아온 정수기 기사라는 걸 알게 된다. "들어오세요." 나는 얼른 문을 열어준다. 집 안으로 함께 들어와 웃으며 정수기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쩐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엄마가 그녀를 반갑게 맞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선풍기를 켜드릴게요."라는 나의 말에, 엄마는 에어컨을 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커피라도 드려야 하는데"라고 말하자,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조용히 지어 보인 그 미소 속에, 나는 작은 연대의 감정이 묻어 있음을 느낀다.
그녀들의 조용한 상호작용은 오래전 짧은 영상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에어컨을 설치하고 있는 기사에게 어린아이가 건넨 말, "고생이 많아요." 그 한 마디의 언어가 공간을 바꾸던 순간처럼, 지금도 서로를 향한 눈빛 하나, 말 하나가 공간을 따뜻하게 만든다.
우리는 언어와 위치가 너무 빠르게 전환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빠르게 흐르는 세상의 모든 흐름을 우리는 다 알 수 있을까. 다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쩌면 압축된 상징 안에서 찾기보다, 작은 관계 안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런 작은 관계 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를 만들어가는 시간들이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
그녀와 엄마의 따뜻한 상호작용을 보며, 나는 내가 바라던 세계가 결국 이런 작은 감정의 언어 속에 있다는 걸 느낀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배려하는 그 눈빛은, 내가 커다란 말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이 나를 이해하게 만든다. 이런 작은 장면 속에서, 나는 내가 바랐던 세계의 조각들을 발견한다.
요즘 나는 모든 것을 단 하나의 명제, 하나의 영상, 하나의 프레임으로 압축해 전달하는 언어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것이 때로는 너무 커져, 나를 놓치게 만들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너무 커진 언어보다, 이렇게 작고 조용한 순간들 속에서 자기 존재의 언어를 다시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