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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종인 Feb 11. 2016

입술이 닿지 않는 거리

2009.05.03

기억나? 너 때문에 내가 눈물을 글썽이던 날들. 그 때 넌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아이 같았어. 공자국이 선연하게 남아있는 벽을 멍하니 맨손으로 바라보고 있었지. 네가 무얼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나는 네게 글러브를 끼워주었지. 너는 순순히 내게 손을 맡겼어. 크게 열 걸음 정도 너에게서 떨어지고 나서 뒤돌아봤을 때, 네가 나를 보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 담벼락에서 아슬하게 걸친 석양이 너의 얼굴을, 너의 작은 어깨를, 너의 모두를 그림자지게 했으니까. 나는 눈쌀을 찌푸리며 너를 향해 공을 던졌어. 솔직히 너에게만 처음으로 던진 공은 아니야. 몇 명의 아이가 그 공을 던지고 붙잡고 소중히하고 버렸는 지를 굳이 설명할 필욘 없었지. 무엇보다 네가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들어도 별 신경 안 썼을 거란 게 가장 신경쓰인 이유였지만. 사실 내가 손목에 스냅을 줘서 높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이 네게 닿을지 의심스러웠어. 너의 두 팔은 여전히 축 쳐져 있었고, 내가 끼워준 글러브도 벗겨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네 손은 작았으니까. 하지만 너는 정확히 내 공을 받았고, 다시 나에게 공을 던졌어. 공이 글러브 안으로 빨려들어가 내 손바닥을 쳤지. 묵직하게 느껴지는 공의 무게가 잠시 내 숨을 멎게 했어. 그리고 해가 담벼락 뒤로 사라질 때까지 우리의 캐치볼은 멈추지 않았지. 나는 네가 똑같은 코스로 던지는 공을 받으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었어. 그러자 너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지. 내가 한 걸음 다가서며 공을 받으면 너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공을 던졌지. 그때까진 눈물이 나지 않았어. 네가 담벼락에 등이 닿아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기 까지는. 아프더라, 네 공은.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되자 공은 점점 빨라졌어. 아,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내가 한 걸음씩 내딛은 만큼 우리의 거리가 짧아졌으니 공이 빠르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고. 그래도 그건 아니야. 아직도 기억해. 네 공을 받을 때마다 뼈속까지 울려오던 그 통증, 그 찡함. 눈물이 핑돌 정도로 아파서 입술을 꽉 깨물었어. 그리고 너의 마지막 공을 가슴께에서 받았을 때 우리는 그제야 서로 입술이 맞닿을 자리에 서 있게 되었지. 기억나? 내가 너에게 해준 말. 언젠가 나 때문에 반드시 너, 울게 될 거야.

      



그 날, 건조가 끝났다는 알람음이 세탁기에서 울리지 않았다면 내가 어떤 변명들을 더 늘어놨을 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녀는 똑똑하니까 이 정도의 글이라면 충분히 이별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거라 믿었다. 바삭하게 마른 옷들을 꺼내와 침대 위에 뿌려놓고 개켰다. 추석특집방송은 그때나 지금이나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연휴내 그녀와 함께 보려고 저장해둔 미국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보지 말라던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술을 마시며 밤낮으로 보았다. 그녀의 옷가지와 내 속옷을 분류하며 개키고 있자니 딸국질이 나왔다. 목구멍에 손을 넣어 긁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상투적이라고 해야할까, 진리라고 해야할까. 딸국질을 멈추기 위해 코를 손가락으로 막고 여러 번 나누어 물을 꿀꺽꿀꺽 삼키는 것. 한 번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면 또 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된다는 것. 나는 냉장고를 열고 생수병을 꺼내들었다. 갑작스럽게 고향으로 내려간 그녀에게서 도통 연락이 없었다. 삼 년 전만 해도 그녀의 막내 외삼촌까지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로가 만나는 걸 감출 필요가 없었던 사이였는데, 어느새 그녀는 신중한 몸가짐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나는 그녀를 담벼락에 밀어붙였을까. 딸국질이 멈춰서 마저 옷을 개키어 서랍안에 편지와 함께 넣었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시월의 하늘은 맑았고 누구나 돌아갈 고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마치 어딘가를 떠나는 사람처럼 큰 가방을 매고 있었지만 그래봤자 목적지는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내 자취방이었다. 조금만 돌아서 가기로 했다. 분식집에 들러 순두부찌개를 먹었다. 나처럼 혼자 먹으며 힐끔 고개를 들어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도 있었고, 둘이 앉아 별 말없이 소주를 들이키는 남녀도 있었다. 반 정도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맥주 두 캔을 사서 가방 안에 넣었다. 잘 말려놓은 속옷 위로 차가운 맥주 캔이 닿았다. 다시 축축해지겠지만 상관없었다. 대학 정문으로 들어서서 정처없이 걸었다. 문득 들려오는 악기소리에 발걸음을 옮겼다. 노천극장에 다다르자 무대 위에서 팬플릇을 불고 있는 두 여학생이 보였다. 나는 둘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았다. 무대의 소라귀가 적절히 나를 가려주고 있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천천히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 여학생이 다른 여학생에게 연주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시네마 천국의 주제가 첫 소절이 서글프게 흘러나오면 그 뒤에 뭉툭한 느낌으로 반복되었다. 나는 그 뭉툭한 느낌이 좋았다.


“아니야. 그렇게 입술을 닿게 하지 말라니까. 살짝 닿을 듯 말 듯한 느낌으로. 자꾸 그렇게 하면 이렇게 꺼멓게 피가 묻어서 굳게 돼.”


능숙한 여학생이 자신의 악기를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다른 여학생이 손끝을 가져가 입가를 매만졌다. 


“그것 봐. 피 나잖아.”


그리고 둘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에야 다시 서글픈 음색의 노래가 연주되었고, 내가 맥주를 다 비울 때까지 뭉툭한 소리의 연주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입술이 닿지 않는 거리에 있으면 피가 나고 상처날 일도 없을 거고, 내 피로 상대를 얼룩지게 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학생은 피묻은 자신의 악기를 미숙한 학생에게 보여주었고 앞으로도 매번 신입생을 받을 때마다 자랑스레 보여주겠지. 나는 그 사실에 조금 짜증이 나서 담배를 힘껏 빤 후 멀리 손가락으로 튕겨버렸다. 서늘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래를 불렀다. 문득 지나치게 서글픈 가락이라 느껴져 입술을 한 번 질끈, 씹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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