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의 존재를 완성하는 건

epilogue

by 하우스노마드 키라

어릴 적 나는 딱히 잘하는 게 없는 아이였다. 좋아하는 과목도, 싫어하는 과목도 없는 무색무취의 아이. 그래서인지 노래를 잘하거나 그림을 잘 그리는 식의 '타고난 재능'을 가진 이들을 지독하게 부러워했다. 재능이 없으니 노력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공부에 매달렸고, 다행히 어디 가서 공부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고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꽃꽂이, 도자기, 퀼트… 무언가를 쉼 없이 배웠지만 그 어떤 것도 온전한 '내 것'이 되지는 못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학원 강사로서 남들보다 빨리 승진했을 때, 나는 그것이 오로지 내 능력인 줄만 알았다. 소위 말하는 '내 잘난 맛'에 살던 시절이었다. 일 못 하는 동료를 비웃기도 했고, 내가 잘나서 이 자리에 있는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제주에서 책방을 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유능해도, 어떤 일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내 주변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책방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책을 입고하는 법조차 몰랐던 나에게 선뜻 도서업체를 연결해 준 옆 동네 책방 사장님, 맛있는 귤사믹 식초를 찾아낼 수 있게 다리를 놓아준 후배. 그들이 없었다면 키라네 책부엌은 독특한 색을 찾지도, 채워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책방 손님들이 "어떻게 이런 멋진 책방을 할 생각을 했어요?"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 그건 제 능력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능력과 도움으로 만들어진 책방입니다!" 그렇다, 수많은 점이 연결되어 선을 만들고 면을 이루어 이 따뜻한 공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게 '배경이 되어준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것은 뜻밖에도 꽃꽂이를 배우면서였다.

꽃꽂이 할때 오아시스에 가장 먼저 채워 넣는 것은 주인공인 꽃을 꽂는 게 아니라 이름 없는 초록 잎들이었다. 그 풀잎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잡아야만 메인 꽃이 비로소 빛을 발했다. 풀잎이 없으면 꽃은 그저 덩그러니 놓인 외로운 존재일 뿐이었다.


키라네 책부엌 역시 그랬다. 제주 귤밭이 없었다면, 그 주변 수많은 초록 배경이 없었다면 책방은 그저 허전한 돌집이었을지 모른다.


책방 주변에는 계절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배경이 되어준 수많은 존재가 있었다. 봄이면 은은한 향을 내뿜는 귤꽃과 달래, 여름이면 빗방울을 튕겨내며 시원한 소리를 들려주던 토란잎, 제주의 가을을 완성하던 주황빛 귤들, 그리고 한겨울 감기를 달래주던 댕유지와 빨간 동백까지.


5년 동안 계절은 책방 주변을 돌고 돌았다. 귤밭과 온갖 나무, 풀들이 묵묵히 책방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키라네 책부엌이 사람들에게 그토록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었던 건, 그 배경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었기 때문이다.


2023년 12월 12일, 귤밭 안에서의 책방은 막을 내렸다.

책방을 운영한 5년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누군가를 빛나게 하는 것은 그 자신의 능력만이 아니라는 것을. 주변 사람들의 연결과 도움, 그리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자연의 배경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한 존재가 완성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배경이 되고 싶다. 화려하게 돋보이는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그저 존재만으로도 누군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따뜻한 배경.


지난 시간, 키라네 책부엌을 찾아와 주신 모든 분에게, 그리고 이 공간의 배경이 되어준 제주의 모든 생명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다양한 경험과 삶을 살수 있게 해준 제주 '키라네 책부엌'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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