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나는 책은 반드시 사서 읽어야 한다는 나름의 철칙이 있었다. 도서관에 가본 적도 거의 없었고, 책을 빌려본다는 건 내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내가 제주 시골에서 팔자에도 없는 동네책방을 운영하게 될 줄이야.
책방을 운영하면서 가끔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을 때가 있다. 한번은 육지에서 열린 마켓에 참여했을 때였다. 정성껏 큐레이션해 간 책들을 한참 보시던 손님이 불쑥 물었다.
"이 책, 온라인 서점에서도 살 수 있나요?"
그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책 표지를 찍어갔다. 책방 안에서도 비슷한 일은 반복됐다. 구입하지도 않은 책의 내지를 정성껏 촬영하는 손님에게, 조심스레 "책 사진은 구입하신 후에 찍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그는 머쓱했는지 "이 책 살 거예요"라고 답했지만, 정작 계산대로 들고 온 건 전혀 다른 책이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동네책방과 도서관, 그리고 대형서점의 차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이라는 매개체는 같지만, 세 공간의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공간들의 경계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해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약제로 운영하던 책방에 첫 번째 손님이 들어오셨다. 손님은 책방을 가볍게 한 바퀴 둘러보더니, 책 한 권을 골라 내게 내밀었다.
"벌써 가시게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책값을 계산한다는 건 책방을 떠난다는 신호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손님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아니요, 이 책 구입해서 여기서 읽으려고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대부분의 손님은 책방에 머무는 동안 이 책 저 책 훑어본 뒤, 나가는 길에 마음에 드는 한 권을 골라 결제한다. 하지만 이 손님은 공간을 누리기 전, 책에 대한 예의를 먼저 갖춘 것이었다.
내가 너무 감동해서 이 에피소드를 주변 책방 사장님들에게 공유했더니, 다들 "그게 당연하고 기본적인 일인데, 왜 우리는 이런 당연한 일에 감동해야 하느냐"며 웃픈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 웃음 끝에 나는 깨달았다. 동네책방을 즐기는 진짜 묘미가 무엇인지 말이다.
동네책방의 책장은 책방지기가 자신의 취향과 가치관을 담아 한 권 한 권 직접 골라 놓은 책들로 채워진다. 도서관 사서나 대형 서점의 MD들도 심사숙고하겠지만, 작은 책방의 묘미는 대중적인 베스트셀러 뒤에 숨겨진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하는 데 있다. 책방지기의 안목이 아니었다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그런 책들 말이다.
나 역시 다른 동네책방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곳 사장님이 꾹꾹 눌러 써놓은 책의 한 구절을 읽고, 내 책방에는 없지만 책방 사장님의 손길을 거쳐 선반에 놓인 책들을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설렌다. 그래서 나는 다른 책방에 가면 늘 책 한 권을 구입한다. 작은 동네책방의 큐레이션야말로 책방지기만의 고유한 '저작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과 나 사이의 특별한 만남을 주선해 준 책방지기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정중한 방법은, 기꺼이 책 한 권을 구입하는 것이다.
책값을 먼저 지불하고 책방에서 책을 읽었던 그 손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