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속노화와 장수위험
최근에 산 두유는 매일유업에서 나온 '매일두유 렌틸콩'이었다. 다른 시리즈로도 챙겨 먹던 건데, '저속노화 식사법'의 저자 정희원 교수와 공동개발을 했다는 광고에 혹해서 샀다. 성분을 보니 렌틸콩으로만 만든 두유가 아니라, 원액두유 88%에 렌틸콩분말이 들어간 상품이었다.
작년과 올해를 강타한 단어 중에는 '저속노화'가 있었다. 트위터에서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의 저속노화 식사법이 화제가 됐다. 노화 속도를 늦추려면 쌀밥을 렌틸콩과 잡곡으로 바꾸라는 식의 방법들을 알려주면서, 그 유행이 새로운 마케팅 키워드로 급부상했다. 그 뒤로 '가속 노화 식단', '급속사망' 같은 파생 유행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초고령화 시대에 노화를 늦추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지난해 12월 행정안전부가 공개한 주민등록인구 통계를 살펴보면 65세 이상 인구가 1024만 명으로 전체 인구수(5122만 명)의 20%를 넘어섰다. 유엔(UN)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한다.
요즘 은퇴에 대해 강의를 듣고 있는데, '장수위험'이라는 네 글자로 만인의 공포를 압축해 놨다. 골골대며 오래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서른 대에 무슨 은퇴냐고 하겠지만, 은퇴를 하겠다가 아닌, 준비하겠다는 의미다. 초고령화 시대에는 은퇴 후부터 사망까지가 생각보다 꽤 긴 시간이다.
통계청에서 2072년인 약 50년 후의 기대수명을 91.1세로 전망하고 있는데, 이처럼 백세시대가 도래하고 있어 약 65세부터 100세까지라고 하면 35년간 은퇴 라이프를 보내야 한다. 불나방처럼 살아가는 주변 직장인들을 되돌아본다. 밤샘, 주 7일 근무, 과로, 격무에 점철된 젊음이었기에. 동종업계 선배들이 이명, 탈모 같은 잔병치레부터 여러 갈래로 몸이 고장 나는 것을 보면 결국 인생에서 건강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래서 배운 개념이 '장수위험'이다. 준비된 경제적 자원을 모두 소진한 이후 계속해서 생존할 가능성을 말한다. 신종 저주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노인 중 43.8%가 중위소득 50% 미만의 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치다. 우리나라 고령층의 소득안전망이 매우 취약한 상태라는 걸 약 4년간 노인 복지 정책을 다뤘던 터라 꽤 심각한 문제임을 알기에 더 두려워졌다.
멋지게, 아프지 않고 나이가 들고 싶은 마음은 나도 매한가지다. 10km 러닝을 하고, 일주일에 세 번씩 요가를 가며 건강을 챙기고 있다. 다만 몸과 마음이 지속해 건강하기란 마음처럼 쉽지 않다. 말년에 남에게 신세 지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그래서 저속노화의 목표는 급속사망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파생된 게 아닐까.
며칠 전, IFC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수면 위내시경을 받아 맹한 얼굴로 걸어 여의도 화이트리에에 줄을 섰다. 1만 1천 원짜리 생식빵을 우적우적 먹으면서 소망했다. 나이 들어서도 이렇게 호화로운 빵을 먹고 김영옥 선생님처럼 아이돌 콘서트에 가며 멋지게 사는 할머니로 남고 싶다고. 후배들과 주변에 넉넉히 베풀면서. 그러니 물가 상승까지 감안해 최소한 배당금으로 월 오백은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로또와 연금복권을 긁나 보다.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