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그럼프(Grump)'의 뒤끝
1969년, 미국 공영방송 PBS 산하 기관 세서미 워크숍은 아동을 위한 방송인 세서미 스트리트를 처음 선보였다. 할렘을 모티브로 한 배경처럼, 저소득층·소수민족 가정 아이들의 교육 격차를 줄이려는 목적이 있었다. 연구 결과, 이 방송을 본 아이들은 중·고등학교에서 학년을 제때 이수할 확률이 14% 높았다. 단순한 오락이 아닌 사회적 투자였다.
1988년, 세서미에는 ‘로널드 그럼프’라는 악당이 등장했다. 이후 그럼프는 1994년 머펫들을 내쫓아 테마파크를 짓겠다는 탐욕스러운 부동산업자로 재등장한다. 이름처럼 그럼프는 도널드 트럼프를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캐릭터였다. 한편, 같은 해인 1988년 국내 한겨레신문 창간호에는 트럼프의 첫 번째 저서인 '협상의 기술' 광고가 실렸는데, "미국의 대통령감으로 지목받는"으로 수식어를 붙여 홍보했고 그 예언은 들어맞았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미국 대통령이 됐다. 그리고 공영방송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트럼프는 NPR과 PBS가 “기자로 위장한 민주당의 기관”이라며 납세자의 세금으로 운영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왔다. 악당 그럼프의 심술이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결국 미국공영방송공사(CPB) 운영 중단을 선언했다. PBS, NPR, 전국 1500여 개 공영방송국에 자금을 배분해 온 심장이 멎는 순간이었다. 지난달 미 의회는 국제원조 및 공영방송 예산 90억달러(약 12조5천억원)를 삭감하는 내용의 예산 법안을 처리했고, 이에 따라 미 CPB의 2년 치 예산 11억 달러(약 1조5천억원)가 삭감됐다.
파장은 즉각적이었다. 알래스카, 사우스다코타, 텍사스 등 지방 소도시와 농촌 지역의 PBS·NPR 계열 방송국 상당수가 존폐 위기에 몰렸다. 광고 수익이 취약한 이들 방송국은 CPB 지원 없이는 송출 자체가 어려운 곳이 많았다. 교육 프로그램뿐 아니라 지역 뉴스, 문화·역사 다큐멘터리, 장애인·이민자 대상 방송이 줄줄이 편성을 중단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KBS 수신료 분리징수는 물론 MBC의 ‘바이든-날리면’ 사태, TBS 지원 조례 폐지에 YTN 매각까지 윤석열 정부 시절 국민의힘이 방송의 근간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골적으로 나선 행적들이다. 이와 함께 공영방송 이사진과 관련 기관장 교체로 방송 장악이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 법원은 권태선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남영진 전 KBS 이사장, 김의철 전 KBS 사장의 해임을 부당하다고 판단했고, 지난 7월 17일에는 정연주 전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해촉 처분도 취소했다. 방식과 배경은 다르지만, 권력의 결정이 방송의 생태계를 흔드는 모습은 묘하게 닮아 있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미국 전역에 TV가 보급되던 배경에서 등장했다. 국내에선 KBS의 근간이 되는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도 한국어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이후인 1933년부터 라디오 보급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후 공영방송의 역할을 다하며 한국 현대사와 함께해 왔다.
현재 국내외에서 '공영방송 정상화'는 필수적으로 진보 진영이 사수해야 할 과제로, 보수 진영은 이를 막아서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묻고 싶다. 그 ‘정상화’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치인들이 말하는 ‘공영방송이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수식어는 실제로 어떤 의미인가? 송출 플랫폼으로서 살펴보면 이미 사람들의 거실에서 TV는 점점 자리를 잃었고, 세서미 스트리트는 공영방송 예산 삭감과 맞물려 넷플릭스에서 송출될 예정이다. 사견으로 세서미는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더 오래 사랑받게 되리라 예상한다.
‘TV’와 ‘라디오’가 보급되던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글로벌 OTT와 유튜브가 중심이 되며, 각각 스마트폰을 쥐고 있다. 사람들은 AI에게 질문해 정보를 취한다. 이런 가운데 공영방송은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브레이킹 뉴스? 유익한 정보? 재미? 휴머니즘? 지하철만 타도 어르신들의 폰에는 유튜브와 틱톡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공영방송이 생명력을 가지려면 지금의 뼈대로는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