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화재경보란?

이건 거의 철인 삼종 경기 훈련이다.

by 존재의 가벼움


홍콩에서는 꽤나 자주 소방점검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느닷없이 하는 것은 아니고 점검 날짜가 주로 엘리베이터 내부와 외부 문 열리는 공간에 붙는다. 정확히 시간까지.


그렇게 소방점검을 하는 날은 화재경보가 울리는 느낌이나 상황 등을 대략 경험하곤 하는데, 어떤 날은 정말 다를 때가 있다. 점검 날이 아님에도 화재경보기가 울리는 그런 날.


나는 7년을 홍콩에 살면서 몇 번을 겪어보긴 했다. 어떤 회사를 다녔을 때는 건물에 수시로 화재경보가 울렸지만 모두가 무시하는 분위기였고, 물론 궁중 심리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 또한 경보기가 멈출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는 쪽이긴 했다.


하지만 집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마냥 경보기가 꺼질때까지 상황을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2번의 화재경보로 실전과 다름없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


한 번은 새벽이었다.


화재경보가 울리고, 건물이 떠나가도록 쩌렁쩌렁 울리는데 잠에서 안 깨어날 수 없을 정도의 소음이었다. 잠옷 차림이었고,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복도에서는 사람들의 어수선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말 불이 난 것일지도 모른다. 남편과 간단히 옷을 주워 입고 신분증만 챙겨 내려갔다. 계단을 타고 내려갔는지 엘리베이터를 탔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계단을 통해 내려갔을 것이다.


그때 살던 곳은 복도식 아파트로 계단에도 창문이 많아서 환기도 잘되고 밖의 상황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게다가 남편이 같이 있었으니 어떤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로비로 내려갔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로 꽉 차있었고, 소방차도 2대나 와있는 상태였다. 홍콩은 무슨 일이 나면 공무원 10명 이상의 인원들이 오기도 하지만 놀람의 연속이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불은 나지 않았고, 조금만 예민해도 센서는 작동되기 때문에 아무 일 없이 소방대원 몇십 명이 건물을 확인 후 돌아갔다.


그때 난 생각했었다.

- 무슨 일이 나면 신분증만 챙길 것이 아니라 가방에 귀중품 정도는 넣어두고 노트북까지 가방에 챙겨 나오는 건 어떨까?

분명히 어떤 사람은 노트북도 가슴에 꼭 껴안고 나온 걸 봤단 말이지? 챙길 껀 챙겨 나오는 게 맞지 않나?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오늘 또 화재경보가 울렸다.


이사한 지 한 달이 안 된 집이다. 이제 막 비상구 위치와 연결구조를 익혔다. 그리고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서 그 시간이면 보통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인데 화재경보기가 세차게 울렸다. 상상 이상의 소음이었다. 현관문을 열었더니 복도에는 화재경보와 함께 빨간 불도 깜박이며 나의 마음을 재촉였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필 이 건물 비상구는 창문이 없는 구조고 우리 집은 19층이라 내려가는데 한참 걸릴 것이 뻔했다. 비상구에서 숨막혀 죽을까봐 걱정이됐다?!!


- 무엇을 챙겨야 하나?!


마음이 급했다. 정말 불이 났으면 어쩌지. 어디에서 난 걸까? 내려가다가 연기를 만난다면? 아니 비상구가 두 개인데 대체 어디 구역에서 불이 난 걸까?


무엇을 챙긴다는 마음이 안 생겼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란 걸 직감하면서도 일단 이 건물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왜 하필 이 시간에 우리 층엔 아무도 없는 거야? 나 혼자 복도에서 허둥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체크하는데 작동이 안 됐다. 아뿔싸. 작동이 되어도 안탈 것이지만 정말 작동이 멈춘 거라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걸려있는 에코가방을 들었다. 도어록 카드와 지갑, 신분증이 들어있었다. 외출 시 대강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다.

- 그래 이거면 충분하지.

핸드폰을 들고 비상구로 뛰었다. 간단한 물수건을 챙길걸 그랬나 후회됐다.


- 아니야 시간이 없어 일단 건물에서 나가자.


막연한 불안감을 움켜쥐고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데 화재경보 소음과 빨간 사이렌 불빛으로 난 거의 패닉상태까지 근접해 있었던 것 같다. 오감을 최대한 끌어올려 어딘가에서 냄새가 나는지, 뿌연 연기는 없는지, 사람 소리는 안 들리는지 찾아봤지만 소음 이외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왜 아무도 안 보여? 이 건물에 나 혼자야? 로비로 안전히 갈 수 있을까. 그곳에는 건물 관리자도 있고, 뭐라도 있을 거야.


그리고선 5층 정도 내려왔을 때인가 어떤 남자가 비상구에서 나가는 것을 봤다.


- 저기요!!! Do you know what happened now?

난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누구라도 봤으니 된 거다. 그 청년은 잘 모르겠다면서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안심할 수 있는 정황들이 꽤 있었는데 난 아무래도 난 패닉상태였나 보다.


로비에 다다랐을 때 내 발은 거의 꼬여있었다. 덜덜덜 떨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거의 울뻔할 지경이었으니까.


로비에는 역시나 사람들로 붐볐고 소방차 한대가 와있었다. 10명이 넘는 소방대원이 와 있었다. 그리고 막, 화재경보가 꺼졌다. 소방대원이 껐고, 화재경보가 울리는 동시에 자동으로 소방차가 오는 것이 국룰이기 때문에 거의 바로 출동하여 경보기를 끈 것 같았다. 10분 이내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난 십 분도 채 안 되는 공포에 눌려 패닉상태에 빠질뻔했다니.


홍콩의 화재경보 시스템은 소방서와 바로 연결되어있다고 한다. 게다가 너무 예민해서 담배연기 때문에 경보 시스템이 작동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한다. 이번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센서가 예민하여 작동한 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후기를 남편이 돌아온 오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번일로 내가 겪은 공포는 불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 벌어질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이 큰 불안으로 다가왔다.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공포가 이렇게 커다란 것이었다니. 건물을 벗어나고 스타벅스에 앉아 다디단 프라포치노를 마시며 잠깐 생각해 봤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또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언제까지 신경발작 일으킨 환자처럼 덜덜 떨며 비상구를 내려갈 것인가.


비상구를 향해 결국 탈출했잖아. 그것만 생각하자 다음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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