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원더우먼>은 어떻게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는가
1941년 탄생한 마블 코믹스 원작 <원더우먼>은 푸른 눈과 흰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미국의 백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러한 원더우먼의 시각적인 상징성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흰 피부에 푸른 눈, 미국 국기를 연상케 하는 여성의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천으로 된 바디수트는 오랜 기간동안 상업화 또는 패러디 되어 원더우먼의 '시각적 상징'이 되어왔다. 그런데 2017년, 새로운 메시지 전달을 위해 이러한 시각적 상징의 일부를 과감히 버린 새로운 원더우먼이 등장했다. 2017년의 원더우먼의 변화는 제작 과정에서 시대적인 이념 변화를 반영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원더우먼을 그간 영속화 되어왔던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여성성에서 탈피시킨 것이다.
새로운 원더우먼의 주인공, 다이애나는 백인 여성이 아닌 유색 인종인 원주민 여성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여성들만 모여 사는 섬,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우두머리로 전쟁 대비와 섬의 결계를 강화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그러던 와중에 섬에 불시착한 독일군 스티브 트레버를 통해 섬 밖에 위치한 인간세계의 존재와 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극을 알게 된다. 다이애나는 본인이 가진 신의 능력을 인간 세계의 혼란(전쟁)을 해결하는데 쓰기로 결심하고 고향 아마존을 떠나 트레버와 함께 인간 세상으로 간다. 영국에 도착한 다이애나는 전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전쟁의 신 아레스를 찾아가 결투를 벌인다. 인간 세계를 구하기 위해 모험하는 동안 스티브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다이애나는 아레스를 죽이고 인간들을 구하게 된다.
새로운 원더우먼이 갖는 의의는 크게 두 가지 - 유색 인종 영웅의 등장과 전통적인 여성의 성 역할에서의 탈피 - 로 나뉜다. 그 동안의 헐리우드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은 백인의 미국인이어야만 했다. 이러한 주인공 설정은 두 가지 간접적인 미디어 효과를 가진다. 히어로 탄생의 공간적 배경을 미국으로 설정함으로써 '미국이 인류를 구한다'는 국가주의적인 전제를 자연스럽게 구축할 뿐만 아니라 지구/인류를 구하는 힘 있는 존재를 백인으로 설정함으로써 유색 인종들의 인권에 반하는 백인들의 권위를 영속화 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더우먼의 주인공을 유색 인종설정했다는 것은 기존의 인종적 위계질서 (racial hierarchy)에 도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심지어 다이애나를 원주민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미국과 같이 백인이 원주민의 땅과 힘을 빼앗은 나라에서 인종 권력 관계를 전복시킨 셈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 영화는 페미니스트의 다양성과 차별의 교차성을 수용하는 3차 페미니즘을 반영한다. 여성이자 원주민, 즉 젠더와 인종 두 카테고리에서 모두 상대적 약자에 해당하는 존재 (차별의 교차성, intersectionality)를 가장 힘 있는 존재로 설정하면서 실제로 사회에 존재해 온 불평등과 차별에 간접적으로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이다. 미디어에 약자를 등장시키고 주인공을 약자를 설정해 현실의 사회적 약자의 서사를 영화의 줄거리로 풀어냄으로써 현존하는 차별을 타파하려는 노력이다.
또한 다이애나는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설정하는 여성 인물들의 전형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기존의 전통적 여성성에서 벗어난 다이애나는 다른 영화의 틀 안에 같힌 여성 주인공들을 비교할 때 더욱 특징이 뚜렷해진다. 우선 다이애나는 본인의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의 서사를 주체적으로 구축하는 여성 주인공이다. 다이애나의 이러한 주체적인 서사와 목적의식은 기존의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의 것들과 차이가 난다.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내로써의 서사가 아니며 상대적인 약자로써의 서사도 아니다. 한 세상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외부 요인에 휘둘리지 않고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풀어나가는 다이애나의 서사는 몹시 새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인간 세계를 혼란과 폭력으로부터 구해내겠다는 선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다이애나는 사랑에도 흔들리지 않음으로써 주류 미디어로 소비되었던 다른 작품들의 여성 캐릭터들과 뚜렷하게 차이를 보인다. 아레스와의 전쟁 도중 다이애나는 스티브와 인간 세상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때, 그녀는 단호하게 스티브가 아닌 인간 세계를 선택한다. 사랑에 울고 웃으며 사랑하는 이를 위해 헌신적이던, 사랑이 인생의 가장 큰 가치인 것만 같던 대부분의 미디어가 그리는 여성상에서 멀어진 것이다.
최근 들어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여성의 모습들이 미디어에서 새로 생산되고 있지만, 원더우먼은 오랜 시간동안 '여성성'을 시각적 상징으로 내세웠던 캐릭터를 아주 새로운 모습의 여성 캐릭터로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뿐만 아니라, 백인 위주의 히어로물 대신 미국 인종 위계질서의 약자로 대유되는 원주민을 히어로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기존에 마치 고정관념처럼 생산/소비되던 젠더와 인종의 위계질서가 전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