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글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스스로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어떤 이에게 나의 마음, 생각을 정리하고자 함임으로 가벼운 말투로 서술하고자 한다.
학생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은 정의감, 그리고 직업적 책임감 때문에
가르침의 기술은 나에게 있어 항상 화두다.
오늘은 가르침에 대해서 적어볼까 한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 심리학-문영호 저'를 읽던 중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
"소비자는 기능이 좋은 제품을 선택한다는 착각이죠. 물론 기능이 중요하고, 기능을 최우선시하는 소비자도 있습니다. ... 소비자가 궁극적으로 끌리는 건 제품의 기능이 아닙니다. '매력'에 끌릴 뿐입니다."
나의 경우에 대입해 보았다.
나는 물건을 살 때 아주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가?
그렇지 않았다.
물건의 스펙을 전부 살펴보지도 않거니와 대략적인 느낌이 좋은 물건을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문득, 강의는 어떤가?
나는 생각했다.
학생들의 강의 선택 기준은 완벽한 이성적인 근거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은 어떤 강의를 선택하는가?
학생들은 선생님들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힘든 위치이다.
강사는 수업을 들어가기 전 모든 내용을 숙지하고 논리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비치는 모습은 완벽하게 풀이되는 문제들과 매끄러운 설명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선생님이 진짜 실력을 가졌는지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다.
교육과정을 관철하는 큰 맥락을 학생 본인이 가지고 있다면 선생님의 실력을 판단하기 쉽겠으나,
그러한 능력을 가진 학생이 학원을 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매력적인 강의들을 선택한다. 제품을 구매하는 수순과 같다.
선생님의 수학적 능력이 정확하게 측정되지 않으므로 나에게 와닿는 단어의 선택, 풀이의 세세함의 정도, 말투, 억양, 그로 인해 파생되는 재미 등 종합적인 요소를 판단하여 본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강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가르침과 학생의 강사 선택이 무슨 연관이 있겠나 할 수 있겠지만 이는 꽤나 중요한 요소이다.
강사의 가르침은 수강하는 학생이 있기에 존재한다.
교육의 대상이 없는 가르침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가르침을 기술적으로만 보았다.
학생들에게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기만 하면 그에 따른 만족할 만한 결과가 도출될 거라 생각했다.
나의 강의 콘텐츠의 질만이 수업의 질을 결정한다고 본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정보를 어마어마하게 쏟아낸 첫 수업 이후 그 수업이 통째로 다른 분에게 옮겨졌다.
이유는 "저희가 듣기에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은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데 문제 풀이에 적용할 수가 없어요."였다.
착한 학생들의 순화된 표현이었지, 그만한 전달력과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음이다.
폐강이었다. 가르침이 사라졌다. 양질의 정보는 더 이상 쓰일 장소를 잃었고, 그 가치는 그대로 소멸되었다.
가르침에서 쌍방의 소통은 콘텐츠보다 중요하다. 소통을 통한 청자의 깨달음이 교육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은 강사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강사는 학생들이 매력적으로 느낄만한 요소를 지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준비했던 콘텐츠들이 학생들의 머릿속에 올바르게 소비된다.
그렇다. 나는 '매력적인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지식이 학생들의 마음, 생각에 전달되어 그들의 목표에 다다르게 할 수 있다.
나의 매력은 무엇이고, 나에게 필요한 매력을 무엇일까?
지금 현재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무기가 있다면 잘 가꾸어 날카로움을 유지해야겠고,
현재 가지지 못한 그것이 있다면 꾸준히 숙련도를 올려 적재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하겠다.
학생들을 위하는 현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또 창의적인 미래의 새로움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당최 어떤 것들이 매력의 요소가 될 것인가!
역시나 생각이 많아지는, 그렇기에 인문학을 놓을 수 없는 밤이다.
- 2024.4.17. 과제 피드백을 마친 2시 언저리에 김웅록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