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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Apr 03. 2019

각자의 집착 포인트는 배낭을 보면 알 수 있어

미니멀리스트의 배낭 속

걷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


 배낭을 메고 여행한 지 어느덧 4년이 넘었다. 백발 할머니가 되어도, 무릎과 어깨가 허락하는 날까지 배낭을 메고 여행하고 싶다. 몸과 배낭이 한 몸이 되어 각 잡힌 안정감과 조금은 누추한 차림이더라도 배낭을 메면 낭만 가득한 여행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배낭을 메지 않고 여행하는 날이 오게 되면,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하고 조금 슬퍼질 것 같다.


 배낭에 짐을 싸다 보면 캐리어에 짐을 넣을 때 보다 부피, 무게, 실용성 이 세 가지를 중점을 두고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배낭의 무게가 여행의 질을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짐을 싸는 게 시작부터 끝까지 난항이었다. 여행에서 조금이라도 필요할 것 같은 물품들을 쓸어 담은 배낭을 보며 엄마가 “차라리 집을 가져가지 그러냐?” 말씀하실 정도로 넣을 수 있는 최대치를 넣었다. 그때 가방 두 개의 무게는 25kg였다. 깜깜한 밤에 멕시코시티 시내에 도착해 숙소를 찾고 헤맸는데, 첫 여행지의 설렘과 로망은 온데간데없이 여권과 휴대폰만 빼고 누군가 배낭을 훔쳐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집어던지고 싶었다. 외딴 무인도에 여행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챙기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짐을 발로 꽉꽉 누르고 눌러 겨우 배낭 버클을 잠그기 일쑤였다.

 확실히 두 번째 여행을 준비할 때, 배낭을 싸는 속도와 기술에서 스스로 노련함이 느껴졌다. 여행지에서 필요한 옷을 단숨에 집어넣고, 불필요한 물품은 과감히 줄였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아 여행지에서의 생활패턴이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게 눈에 선했다. 겉보기엔 예쁘지만 불편한 옷을 챙겨봤자, 내 등치가 커 보이지 않으면서 편한 옷만 골라 입을 나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짐 싸기를 포함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를 잘 알면, 대체로 결정을 신속하게 내릴 수 있었다. 첫 번째 여행과 두 번째 여행에서 교집합이 되는 물품은 많았지만, 수량만은 달랐다. 딱 하나씩 챙겼다. 첫 번째 여행 땐, ‘이게 고장 나면 어떡하지?’ ‘이게 여행지에서 팔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두세 개씩 넣었다면, 두 번째 여행 때는 ‘없으면 다른 물건으로 대체하지.’ ‘없으면 없는 대로 배낭 가볍고 좋겠는데?’ 마음가짐으로 바뀌었다. 첫 번째 여행으로 집착 보단 포기하면, 몸도 마음도 편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느 여행지와는 달리, 순례길 걸을 때 유난히 배낭을 멘 내 뒷모습이 많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자고 마음먹고 난 후 본격적인 <짐 줄이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한국으로 돌아와서 나의 미니멀 라이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일명 순례길이 쏘아 올린 공! 짐 줄이기는 쉬웠다. 자주 꺼내지 않는 옷과 물품을 배낭 바깥으로 꺼냈다. 택배를 보내던지, 한국에서도 쓸모가 없다고 느껴지면 과감하게 휴지통으로 향했다. 옷의 가짓수가 늘지 않았던 건, 나만의 배낭 출입 철칙이 있기 때문이다. 한 종류의 옷을 사면 같은 종류의 옷을 버리는 것. 사고 싶은 옷과 마주하고 내면의 나에게 묻는다.

‘호영아. 이 원피스를 사면 내가 가지고 있는 원피스를 버려야 해. 그래도 괜찮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면 배낭에 있던 옷은 버려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옷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서 옷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건 한국에서보다 훨씬 쉬웠다. 또한 초반에 넣을까 말까 고민하던 물건들은 버려졌다. 넣을까 말까 고민했던 건, 있어도 되지만 없어도 됐던 물건이었다. 나에게 꽤 관대한 편이라 생각했지만, 배낭 무게 보존의 법칙 앞에서는 한 없이 엄격해졌다.


 “이건 꼭 넣어야 해! 안 넣으면 섭섭하지” 말하며 흥분해서 집어넣었던 물건들은 배낭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새 옷보다는 오래 입어 반질반질해진 옷이 손이 가고, 새로 사서 빳빳한 옷은 버려졌고, 목이 늘어난 티셔츠는 이틀에 한 번씩 등판했다. 내 가방을 차지하고 있는 녀석들을 보면 하나 같이 때가 타고, 올이 풀리고, 모서리가 닳은 물건들뿐이었다. 배낭에서 가장 먼저 버려진 물건은 화장품이고, 출국일로부터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버티고 있는 건 스피커, 고프로, 고춧가루, 대용량 라면수프와 같은 각종 조미료다. 하연이가 내 배낭을 보며 말했다.

각자의 집착 포인트는 배낭을 보면 알 수 있어. 언니 배낭 봐. 식재료가 옷 보다 더 무겁잖아.”

여행을 시작하며 요리하는 재미에 푹 빠진 내 상태를 그대로 반영한 배낭 그 자체였다.

순례길을 걸을 땐, 고칼로리 음식과 샐러드를 곁들여 먹을 때가 많았다. 한참을 걷다가 나무 그늘이 나오면,  철푸덕 앉아 핫도그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연령대의 다양한 국적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동시에 배낭 속 본인만의 다양한 아이템을 엿보기 좋은 환경이었다. 배낭에 우쿨렐레를 가지고 다니며 밤마다 미니콘서트를 여는 사람, 장르소설부터 시작해 시집까지 책으로 배낭 절반을 채워 갖고 다니는 사람, 저녁 식사할 때 곁들여먹을 알싸한 고추 장아찌를 갖고 다니는 사람, 순례길 풍경을 담으려고 DSLR 카메라와 각종 촬영 장비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 시내 나갈 때 입을 살랑거리는 노란 원피스 한 벌을 가자고 다니는 사람. 각자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을 등에 지고 다닌다. 누군가는 무겁게 왜 들고 다니냐고 핀잔을 듣는 무용해 보이는 물건일지라도, 나에게는 한없이 소중한 무언가를 내 뒤에 지고 다닌다. 내가 숙소에 돌아와서 씻고 나오면 오늘은 무엇을 요리해 먹을지 행복한 고민하는 것처럼, 배낭 속을 들여다보면 숙소로 돌아와 무엇에 집중하는지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팜플로나에서 생장 가는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Edurne가 “배낭은 너의 또 다른 세계야.”라고 말했듯, 배낭은 그 사람의 작은 세계를 보여준다. 누군가 궁금한 게 있거든, 그 사람의 가방을 살펴보라!


듣다.

노리플라이의 낡은 배낭을 메고를 듣다.


*자주 읽고, 가끔 씁니다.

@hoyoung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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