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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Aug 12. 2019

42년생 옥순이의 만두

수십 년간 수천 개의 만두를 만든 우리 할머니

 누군가 내게 죽기 전에 먹고 싶은 한 가지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뉴욕에서 먹었던 티본스테이크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빈번하게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할머니가 만든 만두다. 세계여행을 하면서 고국의 맛을 대체할 수 없었던 음식은 얼큰한 김치찌개도, 그 흔한 삼겹살도 아닌 만두였다. 타지에서 할머니 만두가 생각날 때면 현지 식당에 가서 각국의 만두를 주문했다. 재료나 만드는 방법은 조금씩 달랐으나, 한국 식당이나 마트에서 파는 만두와 비슷한 만두는 많았다. 할머니가 만든 만두만큼 고국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만한 만두 찾기는 끝내 실패했다.

인도 고아에서 주문한 티베탄 음식점에서 주문한 티벳 전통음식 모모
포르투갈 리스본 중국마트에서 산 중국만두 딤섬 / 우크라이나 식당에서 주문한 우크라이나 만두 피에로기

할머니가 직접 반죽한 보들보들한 피에 탱글탱글한 당면, 깊은 맛이 나는 묵은 김치, 부드러운 두부, 굵직하게 썬 돼지고기, 아삭한 양파와 숙주를 넣고 만든 만두. 얇고 쫀득한 피와 튼실하게 들어있는 속재료의 조합은 뒤끝 없이 깔끔해서 자꾸 손이 가게 만든다. 원재료의 풍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할머니 만두를 먹고, 식품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만두는 두어 개 먹으면 금세 질린다.


만두를 먹을 땐 만두만큼 간편한 음식이 없는데, 만두를 만들어보면 이만큼 품이 많이 드는 음식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만두 만드는 과정을 알고 나서는 쉬이 먹기 힘들다 생각하지만, 한 번 먹고 나면 큰 수고로움을 감수하고도 생각나는 음식이 할머니 만두다.


 ‘떡 먹자는 송편이요, 소 먹자는 만두’라는 말이 있지만, 할머니가 반죽한 쫄깃한 식감의 피는 만두 맛의 정점을 찍게 한다. 만두피는 밀가루, 물, 소금, 식용유를 넣고 반죽한 후 반나절이나 하루 정도 숙성시킨다. 반죽이 숙성되면 촉촉하고 말랑해지는데 그때부터 할머니는 만두소 만들기가 시작된다. 당면을 삶는다. 김치 망에 넣고 김칫국물을 짠다. 돼지고기와 양파를 굵직하게 썬다. 망에서 김치를 꺼내 썬다. 준비된 소 재료를 큰 통에 넣고 고루 버무린다. 허연 반죽을 동글동글 원형으로 만든 뒤 소주병으로 밀어 얇게 만든다. 만두피에 만두소를 한가득 넣고 피를 빈틈없이 꾹꾹 여민다. 만두를 만드는 동안 큰 솥에 물을 끓이고 쟁반에 쌓여있는 완성된 만두를 찜통에 넣는다.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만큼 여러 과정을 거쳐 만두가 완성된다.


이제 첫 번째 만두 한판이 익을 때까지 다 익은 만두를 상상하며 두 번째 만두를 빚으면 된다. 15분 정도 삶으면 만두가 완성되는데, 만두를 만들다 만 손으로 갓 찐만두를 호호 불어 먹을 때 비로소 최상의 맛을 느낄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만드는 도중에 먹는 만두만큼 감칠맛이 날 수 없다. 싱싱한 재료들의 조합과 할머니의 고유한 레시피는 좋지 않을 까닭이 없다.

만두소가 가장 실하게 들어있는 만두를 내미는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도, 수십 년 전 할머니가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도 아마 손에 가장 많이 묻혔던 건 밀가루 반죽이라고 하셨다. 할머니 어렸을 적엔 수제비와 만두를 지금보다 빈번하게 만들어 먹었다. 할머니는 몇 날 며칠 만두를 천 개도 넘게 만든 적도 있다고 하셨으니 말이다. 만두를 빚어 조카들과 자식들이 배불리 먹은 후, 그제야 본인도 만두 두어 개를 집어먹었다. 자식들과 조카들이 단숨에 수십 개씩 먹어치울 때면 더 빨리 만들고 싶어 조바심이 났지만, 맛있게 먹는 자식들을 보면 만두 만드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만두를 수천 개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할머니의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만두를 빚고 우리에게 한아름 내어주실 때마다 말씀을 하신다.

“남들은 바닥에 앉아 만두를 빚는 게 중노동이다 뭐다 힘들다 해 쌌는데 나는 텔레비전 보면서 만두 만드는 게 시간이 어떻게 그렇게 금방 가는지 모르겠어. 너무 재밌어.”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고는 만두 재료를 다듬고 섞는다. 밀가루 반죽을 치대고 문대고 말랑해질 때까지 조물 거리며 드라마를 보신다. 드라마 처연한 주인공역에 몰입해서 눈물을 흘리기도, 악역이 나오면 신랄하게 욕을 하기도 하신다. 만두를 빚을 때 할머니는 최수종 딸 도란이가 되기도 하고, 예서 엄마 한서진이 되기도 한다.


 엄마는 몸이 쳐지거나 힘이 없을 때 할머니 만두가 생각난다고 한다. 엄마에게 할머니 만두는 소울푸드이자, 일종의 보양식이다. 엄마는 며칠 전 마트에서 만두 재료를 사서 할머니 댁에 갖다 드렸다. 마트와 할머니 댁을 걸쳐 집으로 돌아온 만두가 먹고 싶은 엄마는 말한다.     

 “할머니가 지금쯤 반죽을 시작했겠군.”     

 “할머니는 지금 우리가 보는 드라마를 보며 만두를 빚고 솥에 만두를 찌고 계실 거야. 1시간도 안되어 할머니가 만두를 가져가라고 전화가 올 거야.”     

 40분쯤 지나 엄마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할머니에게 다 만들었냐고 묻기도 전에 할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들려온다.

“만두 먹으러 와.”     

 엄마는 샌들을 대충 신으며 말한다.

 “호영아. 엄마가 만두

 가지고 올게.”     

 할머니의 부름에 엄마는 할머니 댁에 달려가 갓 찐만두를 먹는다. 엄마는 이어달리기 선수가 바통을 전달하듯 만두가 한가득 담긴 김치통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엄마가 가져온 따듯한 만두를 오빠들과 크게 깨물어 먹는다.


할머니가 수십 년간 만두를 수천 개 만들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할머니는 만두를 만들 때만큼은 42년생 옥순이의 마음이 아니라, 주렁주렁 달린 자식들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으로 만들어서일까. 만두를 빚으며 드라마 속 여러 등장인물이 되었듯 엄마의 마음이었다가 때론 할머니의 마음으로 만두를 빚으셨을지도 모른다.


만두를 한 입 베어 물면 미소 띤 할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동그란 얼굴에 길쭉한 입술, 작지만 또렷한 눈동자, 오목 팬 보조개를 생각한다. 그럴 때면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마음의 모서리를 빈틈없이 꾹꾹 여민다.


할머니 만두를 오랫동안 빈번하게 먹고 싶다. 가능한 한 아주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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