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에세이 소개 ② '경이로움'의 장소

모든 것이 정보가 된 시대, 우리가 잃어버린 '경이로움'의 장소

by 이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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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에세이의 발견 ②


모든 것이 정보가 된 시대, 우리가 잃어버린 '경이로움'의 장소 —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Karl Ove Knausgaard), 「The Reenchanted World」를 읽고.


https://harpers.org/archive/2025/06/the-reenchanted-world-karl-ove-knausgaard-digital-age/


전편에서 살펴본 제프 다이어의 에세이가 사라져 가는 존재를 간신히 붙잡는 '포착(Apprehend)'에 관한 기록이었다면, 크나우스고르의 이 글은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의 상실(Loss of the world)'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디지털 정보와 이미지로 치환되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세계로부터 소외(Alienation)되고 있는지 추적합니다.


1. 정보라는 함정: 지식은 어떻게 세계를 텅 비우는가


우리는 구글링 한 번으로 지구 반대편의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확인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역설적으로 이 지식이 세계를 '얇게' 만든다고 진단합니다.


“While knowledge has no particular time or place and can be transmitted, experience is tied to a specific time and place and can never be repeated. For the same reason, it also can't be predicted. Those two things—the unrepeatable and the unpredictable—are what technology abolishes.” (지식은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전수될 수 있는 반면, 경험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묶여 있으며 결코 반복될 수 없습니다. 같은 이유로 경험은 예측될 수도 없습니다. 반복 불가능함과 예측 불가능함—기술이 폐기하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이미지는 존재의 거리를 좁혀주는 듯하지만 그 현존은 허구에 가깝습니다. 작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This is my vision, a self-referring world, a world in which there is no escape.” (이것이 나의 비전입니다. 스스로를 참조할 뿐인 세계, 탈출구가 없는 세계입니다.)


2. 소외의 실체: 보이지 않는 정원


작가는 런던의 자기 집 정원에서 3년 동안 매일 글을 썼지만, 그 공간이 자신에게는 '이질적인 공간'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식물들이 가뭄에 말라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그는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I saw it, but what I saw meant nothing.”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는 형과 함께 직접 물을 주고 흙을 파는 직접적인 제작(Direct making)의 행위를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정원이 의미로 가득 차기 시작했음을 깨닫습니다. 이는 추상적 관계를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안입니다.


3. 물질적 경이: 뇌 수술실의 풍경


작가는 헨리 마시(Henry Marsh)의 뇌 수술 현장을 참관하며 겪은 충격을 서술합니다. 현미경 너머로 본 환자의 뇌는 "산과 계곡, 피의 강이 흐르는 행성의 풍경" 같았습니다.


“I just could not grasp that all her thoughts existed down in that landscape.... Was the multiplication table down in that flesh somewhere?” (그녀의 모든 생각이 저 풍경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구구단이 저 살점 어딘가에 들어있단 말입니까?)


수술실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영혼도 사유도 결국 '살과 피'라는 물질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자각에 사로잡힙니다. 이는 '말할 수 없는 것(Unsayable)'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잃어버린 세계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시도입니다.


4. 시스템의 해독: 다시 '도구'를 손에 쥐는 법


작가는 제임스 브리들(James Bridle)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기술에 휘둘리는 이유가 기술적 문해력(Technological literacy)의 부재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The purpose of the system is what it does.” (시스템의 목적은 그것이 실제로 하는 일입니다.)


브리들이 제안하는 해결책은 '태양열 기구'를 만들거나 가구 제작법을 배우는 것 같은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시스템의 경계를 확인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구체화할 때(Concretizes it), 우리는 비로소 세계에 다시 뿌리내릴 역량(Capacity to respond)을 갖게 됩니다.


5. 에세이를 닫으며: 말할 수 없는 실재


크나우스고르는 엘레우시스 신비주의(Eleusinian mysteries) 의식을 인용하며 글을 맺습니다. 진정한 이해는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완성됩니다.


“An important thing was that this wasn't an experience of passing on knowledge, but an experience of having an experience.” (중요한 것은 이것이 지식을 전달하는 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한다는 그 자체의 경험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제 숫자의 언어가 말해주는 작동 원리 대신, 직접 몸으로 부딪쳐 얻는 존재의 증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6. 덧붙이는 생각: 우리가 잃어버린 '물리적 실재'에 대하여


현대 한국 사회는 그 어느 곳보다 '이미지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스크린 속 타인의 삶을 정보처럼 소비하며 정작 내 손바닥 안의 흙과 내 몸의 고통에는 무감각해지곤 합니다. 흙을 만지려고도 하지 않고, 사실 스스로의 고통에 관심이 없습니다. 소비할 이미지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몸을 굽혀 흙을 만져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공부한다는 것, 혹은 누군가의 임종을 지킨다는 것은 작가가 말한 '물리적 신비'와 직면하는 일입니다. 법전의 논리가 닿지 않는 곳, 상실과 존엄이 교차하는 그 살점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말할 수 없는 실재'를 만납니다. 작가가 정원에 물을 주며 느꼈던 그 "막대한 만족감(Immensely satisfying)"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한번 진짜 세계로 손을 뻗어야 합니다. 자연을 직접 느끼고 만지고 호흡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결국 사람을, 주변을 직접 응시하며 조금씩 시도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세계는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다만 이제는 화면이 아니라, 손을 써야만 만져지는 방식으로.


[다음 예고] 다음 글에서는 조앤 디디온(Joan Didion)의 에세이를 통해, 상실 이후의 삶을 지탱하는 '마술적 사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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