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함께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보지 못했던 진실
The Secret of Who She Was
— Geoff Dyer, 「The Secret of Who She Was」를 읽고
https://harpers.org/archive/2025/05/the-secret-of-who-she-was-geoff-dyer-mother-birthmark/
이 에세이는 어머니를 추억하는 글이라기보다, 뒤늦게 그 삶을 ‘읽기 시작하는’ 기록에 가깝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쓰러진 어머니를 구급차에 실어 보내며 아들은 평생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말을 구급대원에게 툭 던집니다.
“My mum has a very large birthmark on her arm. It’s been the most important thing in her life.” (제 어머니 팔에는 아주 큰 점이 있어요. 그게 어머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나 ‘성취’가 아니라, 평생 가려야 했던 ‘점’이었다는 고백. 아들은 곧 울음을 터뜨리며 아무도 그 점을 보지 못하게 잘 가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장면을 지나며 우리는 예감하게 됩니다. 이 글은 한 사람의 삶을 오래 지배해 온 은밀한 감각을 뒤늦게 더듬어 보는 여정이 될 것이라는 걸요.
작가는 어머니의 점을 언급하는 것조차 하나의 ‘배신(betrayal)’처럼 느낍니다.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숨겨온 비밀을, 그녀가 힘을 잃은 순간에야 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목욕하며 그 점을 늘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I didn’t even notice it)”고 적습니다. 늘 곁에 있었기에 당연하게 여겼던 풍경이, 사실은 한 인간의 영혼을 깊게 침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들은 어머니가 떠나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읽어내기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평생 재봉사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손재주가 좋아 아들의 인형 옷을 멋지게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 꿈을 향해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그 망설임의 근처를 조심스럽게 살핍니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감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Her sense of life was that everything granted to everyone else was beyond her.” (다른 모든 이에게 허락된 것들이 자신에게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이 그녀가 가진 삶의 감각이었습니다.)
남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이 자신에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다는 무력감. 그 감각이 ‘점’이라는 신체적 조건과 영국의 계급적 정서 속에서 그녀의 ‘제1의 천성(first nature)’이 되어버렸음을, 아들은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만히 바라봅니다.
글은 어머니가 피부 이식 수술을 받았던 2차 세계대전 직후의 병원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그곳에는 전쟁의 화상을 입은 영웅적인 조종사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그곳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과 어머니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을 포착합니다. 조종사들의 상처는 국가가 기억해 주는 훈장이었지만, 어머니의 상처는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괴물 같은 것(monstrous)’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요. 작가는 부모님이 그토록 지독하게 매달렸던 사생활 보호를 ‘심리적 동독(psychological GDR)’이라 부르며,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투명해지기를 선택했던 그들의 고독한 요새를 가만히 응시합니다.
4. ‘포착된 세계’와의 작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작가는 정원에 앉아 집과 나무,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계속 울리는 한 단어를 적어둡니다.
“The apprehended world.” (포착된 세계)
여기서, ‘Apprehend’**라는 단어는 완전히 이해했다는 오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라져 가는 존재를 간신히, 아주 잠깐 눈앞에 "붙잡아" 두었다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결론을 내리거나 의미를 정리하는 대신, 그 삶이 어떤 조건 속에서 유지되어 왔는지를 이제야 천천히 바라보게 된 상태. 에세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춥니다.
Dyer는 어머니의 삶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존엄을 회복시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어찌 보면 가장 가까운 타인의 삶 밑바닥에 얼마나 깊은 수치심과 고요한 투쟁이 흐르고 있었는지를 조용히 꺼내 보입니다.
정말 중요한 이해는 늘 너무 늦게 도착하지만, 그 늦은 시선만이 붙잡을 수 있는 진실이 있습니다. 이 에세이는 우리에게 그 서툰 ‘읽기’를 시작해 보라고 나직이 권합니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어떤 풍경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가리는 삶’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은 자신을 설명하기보다 감추는 쪽을 택해 왔습니다. 드러내기보다 무난해지기를, 튀기보다 묻히기를 선택해 온 시간들. 그 선택은 종종 개인의 성향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체면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묘하게 겹쳐집니다. 체면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구성되는 자아의 외피와도 같습니다. 무엇을 말할 수 있고, 무엇을 말해서는 안 되는지, 어디까지가 ‘괜찮은 모습’인지 우리는 너무 일찍부터 배워왔습니다. Dyer의 어머니가 팔을 가리며 살았던 시간은, 어쩌면 우리에게도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을지 모릅니다. 학력, 집안, 돈, 외모, 지역, 말투. 노출되는 순간 설명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는 조건이라면, 차라리 가리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꼈던 경험 말입니다.
특히 외모에 대한 낙인은 한국에서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작동합니다. 겉으로는 개인의 취향과 선택, 심지어 요즘은 노력과 관리의 결과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취업과 결혼, 사회적 인정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조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누군가의 삶 전체를 조용히 제한해 온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계급은 여전히 말해지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원래 그런 집안이 아니야”, “우리는 그런 거 안 해”라는 문장들 속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Dyer가 쓴 것은 영국의 계급사회였지만, 그가 포착한 감각은 낯설지 않습니다. 남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기회가 나에게는 어쩐지 과한 욕심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저건 원래 내 것이 아니다”라는, 설명하기 어려운 슬픈 확신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단지 한 영국 어머니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든 반복되고 강요되어 온 ‘자기 축소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분류하며 살아왔을까요. 그것은 정말 나 스스로의 결정이었을까요. 사실은 그 분류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먼저 정해진 강압적인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녀의 팔에 있던 점은, 우리가 평생 가려온 것들의 감각과 어쩌면 너무 닮아 있습니다.
[다음 예고]
다음 글에서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Karl Ove Knausgaard)의 글을 통해, 모든 것이 정보로 치환되는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경이로움’의 감각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