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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Nov 09. 2019

[미스 슬로운] 정치, 문명화된 전쟁의 최전선에서

종횡무진, 전장을 헤집는 여성 캐릭터의 스피드가 주는 쾌감


눈에 띌 정도로 새빨간 입술의 미스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은 당당하다. 아름답다. 품위가 느껴진다.

그녀는 자신의 청문회가 열리는 날에도 청문회장의 사소한 말실수를 짚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마치 '나를 심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엄청난 착각이다, 내가 예쁘게 봐달라고 당신의 권력에 기어줄 줄 알아?' 하고 호통을 치는 듯한 모습이다.


그녀는 거침이 없다. 성별을 떠나 그녀의 행동은 '권력을 가진 자'의 행동이다. 남자가 했다면 큰일 났을 만한(여자가 해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인) 성희롱 적 농담을 예시로 사용하고, 그녀의 명성은 업계에 자자하다. 엄청난 권력을 손에 쥔 미국 상원의원마저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해 볼 정도로.


원래 성공하면 섹드립 실패하면 성희롱이라 했다. 출처: 미스 슬로운


그녀의 직업은 로비스트. 특정 이익집단의 편의를 위해 입법부와 접촉을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로비'라는 단어가 금전적 혜택이라는 뜻으로 관용화 되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로비스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 또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다리를 잇고 설득을 하는 사람들.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정치라는 것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어 무조건 옳거나 그른 것은 없기에 그녀는 '적당히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수임을 받을 수도 있었다. '쉬말로우 쿠키'는 합리적인 절세의 방법이었고 '누텔라 세금'은 인도네시아의 기간산업을 위축시키는 강대국의 횡포였으니까. 적어도 그녀는 피해 보는 이들이 억울하지 않은 선에서 활동해왔다. 하지만 총기 규제 법안에 반대하는 로비는 어떨까.


실력이 엄청난 사람만 할 수 있다는, '난 하고 싶은 것만 해요' 출처: 미스 슬로운


상원의원 빌 샌포드는 슬로운에게 찾아와 총기 규제 법안인 '히튼-해리스' 법에 반대하는 로비를 의뢰한다. 하지만 슬로운은 상원의원 중에서도 거물급인 샌포드의 제안도 거침없이 깐다(...) 슬로운이 믿는 바로는 총기가 규제되지 않으면 희생자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고, 총기 규제를 반대할 어떤 근거도 찾지 못했기 때문.


'핑크색 포장지'는 여성을 속여 꼬셔낸다는 뜻. 출처: 미스 슬로운


전미총기협회(NRA)는 50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미국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이익단체이고 빌 샌포드 또한 많은 돈을 움직일 수 있는 거물 의원이다. 슬로운이 몸 담고 있는 회사 콜-크래비츠는 돈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많은 수임료를 제시하는 샌포드를 놓칠 생각이 없다. 어차피, 대충 해도 절대 지지 않을 게임이니까.


슬로운은 결국 경쟁회사인 ('3류' 로비회사라 불리는) 피터슨-와이트로 적을 옮겨 '히튼-해리스'법안을 지지하기로 마음먹는다. 승리할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한다. 그녀에겐 현재 열성적 지지자도, 로비 자금도 없는 상태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합법적이고 윤리적인 범위' 안에서 움직이려고 할 때의 일. 슬로운은 집념의 화신이다. 그녀는 상상을 초월하는 전략으로 상원의원들을 하나씩 포섭하고, 수세에 몰린 콜-크래비츠는 비겁한(하지만 당연한) 수로 슬로운을 압박한다. 더럽지만 처절한 개싸움, 슬로운은 피할 생각이 없다. 자신이 오물 덩어리가 되어가더라도.


개싸움 하니 유시민 작가가 떠올랐다  출처: KBS 대화의 희열2


전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 작가가 방송 '대화와 희열'에서 이런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정치는 전쟁을 문명화 해 놓은 것이다. 원래는 총칼을 들고 싸워서 이기면 적을 몰살해 버렸는데 그게 너무 끔찍스러우니까 총칼 대신 대화와 투표로 전쟁을 하기 시작한 거다. 그러니까 정치판은 아무리 문명화가 되어있다고 해도 개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죽음뿐이니까.'


유시민 작가의 행간을 읽어보면 이렇다. '내가 정치를 해보니 이게 추악한 개싸움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개싸움이 사회를 위한 전쟁이니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누굴 죽이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정치를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유시민 작가는 양심적인 집총 거부자인 것이다.


슬로운은 다르다. 그녀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는다. 내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정의로운 결과를 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동료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팔아먹고, 적들의 약점을 잡기 위해 도청까지 시도하려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슬로운.


동료도 믿지 않는다. 사생활 뭐 좀 침해하면 어때  출처: 미스 슬로운


동의 같은 것은 구하지 않아도 괜찮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출처: 미스 슬로운


그녀는 또, 역시, 철저한 벤담의 지지자이다. 절대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이 영화를 보고 아마 어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슬로운의 행동이 비 윤리적 이라며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영화는 그 경계선을 잘 지켜냈고 그래서 훌륭한 작품이 되었다. 그렇게 영화는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은 채 관객에게 물어본다. 당신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영화가 묻는 두 번째 질문은, 이런 거다. 그러면 왜 안되는데?

아니 외않됀데? 출처: 미스 슬로운


헌법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인가? 매춘은 비난받아야만 하는 행위인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신경안정제(정신적 병리의 증거)는 왜 사회적으로 배척이 되어야 하는가? 슬로운은 자신의 행위에 법적인 한계를 두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를 세 번째 관람할 때쯤,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슬로운은 위증을 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 그녀는 사실 지금까지 한 번도 불법적인 영역에서 활동한 적이 없는 것 아닐까? 이 부분이 영화의 의미를 뒤집는 반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나, 스포일러의 가능성이 있어 상상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트리 오브 라이프'로 주목받고, '인터스텔라'와 '마션'을 통해 우주 전문가(?)가 되었던 배우 제시카 차스테인은 이 작품, '미스 슬로운'으로 혼자 극을 끌고 갈 수 있을 정도의 배우라는 것을 증명했다. 미스 슬로운의 카리스마는 마치 그녀를 위해 준비된 한벌처럼 몸에 꼭 맞았고, 복잡한 심정으로 알약을 삼키는 그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해 보였다.


여기서도 차스테인은 대장이다  출처: 마션


이 영화는 단점이 거의 없다. '영화적'이라고 하기에는 편집의 묘를 살리지도 못했고, 화면의 아름다움이나 음악이 예술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극한까지 밀어붙이지 않았다는 뜻이지 그것이 영화의 단점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제에서 좋아할 만한 영화가 아니었다는 뜻.


영화의 최대 장점은 숨 고를 틈도 없이 스피디하게 바짝 조여진 대사, 틈틈이 끼워 넣은 시니컬한 블랙 유머, 그리고 차스테인이다. 물론, 해외 관객들에게는 아주 바짝 조여진 대사와 미국식 조크가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차지하는, 숨가쁜 추격이나 액션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로서 긴장감과 속도감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영화는 영화라기보다 한 편의 정치 미드, 그러니까 넷플릭스의 '지정 생존자'나 '하우스 오브 카드'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흠, 생각해보니 꽤 괜찮은 생각인 것 같다. 차스테인의 슬로운을 몇 년 동안, 몇 시즌씩 볼 수 있다면 나는 매우 찬성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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