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이 최악의 범죄는 아니라니까요, <Crazy, Stupid Love>
불륜을 대하는 태도는 보통 세 가지로 나뉩니다.
부부 관계에서 행해지는 최악의 범죄라는 입장.
잘못이긴 하지만 상대방도 원인을 제공했을 거라는 입장.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일어날 수도 있는 해프닝이라는 입장.
보통의 윤리적인 사람들은 첫 번째 의견을 따르고 있으며, 불륜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여겨집니다. 사실, 개인적으론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불륜만큼 심각한 잘못들도 많은데, 왜 불륜만 이렇게 '죽일 죄'처럼 부각되는 걸까요? 이렇게 생각한 것이 저뿐만은 아닌가 봅니다. 이 시대의 현자, 알랭 드 보통도 <인생학교: 섹스>에서 비슷한 언급을 했어요. 그러니 한번 묻어가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외도를 저지른 배우자가 무조건 다 잘못했고, 정절을 지킨 배우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너무도 쉽게 단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의 의미를 일부분만 이해한 반쪽짜리 판단이다.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지만, 외도에 못지않은 충격과 실망을 주는 배신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를테면 배우자와의 대화에 인색하게 구는 것, 마음이 딴 데 가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 괜히 성질을 부리는 것, 스스로를 매력적으로 가꾸는 데 노력하지 않는 것 등등. <인생학교: 섹스>에서 발췌
모든 케이스에 대입을 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불화는 보통 한쪽의 잘못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불륜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닙니다만, 습관적이고 악의적인 불륜이 아닌 우연한 실수 같은 불륜은 상대방도 원인 제공을 충분히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사람을 외롭게 한 죄'는 불륜과 같은 선상에서 다뤄야 하는 중한 죄라고 생각하거든요.
오늘은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주장과 '사람은 변화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영화 <크레이지, 스튜핏 러브>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결혼 이야기>나 <블루 발렌타인>은 사실 연인들끼리 보기에는 좀 너무 매운맛이라, 덜 자극적이고 순한 맛으로 골라왔어요. 권태를 겪고 있거나 연애에 위기가 찾아온 이들이라면 이 영화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와 <브루스 올마이티>, <세상의 끝까지 21일>에서 코믹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스티브 카렐이 제작과 주연을 맡았습니다. 스티브 카렐, 다들 아시죠? 엄청나게 웃긴 배우입니다. <라라랜드>의 주연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도 보이네요. 대체 왜 한국에서 개봉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두 배우만 팔아도 티켓은 충분히 챙길 수 있을 텐데. <투 나잇 스탠드>에서 그 커다란 예쁜 눈과 요염한 살랑거림으로 남성 관객을 홀렸던 배우, 애널리 팁턴도 등장하네요. 연기 톤도 마음에 드는 배우여서 대성했으면 좋겠는데 눈에 띄는 출연작이 없네요... 로맨틱 코미디로 다시 돌아오길!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씬에서 감독은 레스토랑 테이블 아래쪽을 비춥니다. 레스토랑에 온 남녀들은 모두 멋진 구두와 세련된 하이힐을 신고 있는데, 딱 한 커플만 좀 이상합니다. 남자가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카메라가 서서히 테이블 위로 올라가자, 영화의 주인공, 칼(스티브 카렐)과 에밀리(줄리안 무어)가 나타납니다. 에밀리가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고르다가 갑자기 폭탄 발언을 하네요. "나 이혼하고 싶어."
집으로 가는 길, 에밀리가 넋이 나간 칼에게 설명을 합니다. 자신이 다른 남자랑 잤대요. 자기도 지금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혼란스럽다고 합니다. 칼은 칼 같은 사람이죠. 불륜을 저지른 이상 이 결혼생활에 미래는 없다,라고 생각하고 이혼을 결심합니다.
이삿짐 트럭을 불러 집을 떠나는 칼에게 에밀리가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얘기하며 '요즘 우리가 예전 같지 않잖아.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라고 묻는데 칼은 에밀리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화단에 비료 잘 줘라, 비가 계속 오면 스프링클러는 잠가놔라 같은 뚱딴지같은 소리만 계속하죠.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외도를 저지른 에밀리만 탓할 수 없었어요.
나이가 들어도 계속 서로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잖아요. 데이트를 하러 나가는데 뉴발란스 운동화는 아니죠. 이건 최소한의 예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날 계속 사랑해주길 바란다는 건 너무 건방진 생각 아닌가요?
에밀리는 외로웠을 겁니다. 서먹해진 둘의 관계가, 나를 보아주지도, 매력적으로 보이려 노력하는 법도 잃어버린 칼이 원망스러웠을 거고요. 결혼을 했다지만 나도 여자인데 멋진 사람 만나고 싶은 생각 없겠어요? 하지만 이걸 에밀리가 말하는 순간, 별 대수롭지 않은 잔소리가 되는 거죠. 일이 힘든 걸 어떻게 해?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결혼제도, 혹은 장기 연애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겁니다. 넌 내꺼. 난 니꺼. 이렇게 정해놓고 이거 깨는 사람 나쁜 놈. 이렇게 규정해버리니까 다른 문제들은 다 덮여 버리잖아요. <인생학교: 섹스>에서 긁어왔던 것처럼 '외도 못지않게 충격을 주는 배신'은 많은데요.
나는 헌신적이고 핸섬한 20대의 당신이 좋아서 결혼했는데 결혼하고 나니 배 나온 아저씨가 된다거나, 데이트하는데 영혼 없이 데이트 코스를 반복한다거나. 나는 한껏 꾸미고 나왔는데 꼬질한 운동화를 끌고 나온다거나 하면 화딱지 나는 거죠. 잡은 물고기엔 밥을 안 준다더니. 연애라면 이별을 고할 수나 있지만, 결혼은 어쩔 건가요. 이혼을 하기엔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많은데요.
(물론 저도 이런 Typical 한, 게으른 남성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동도 하고 좀 꾸미고 다녀야 하는데. 얼마 전엔 영혼 없이 데이트 나갔다가 크게 혼나고 왔죠 ㅠㅠ)
자신이 어떤 꼴인지 전혀 모르고 있던 칼은, 픽업아티스트 제이콥(라이언 고슬링)을 만나며 스스로를 깨닫기 시작합니다. 거울을 보니 후줄근한 옷차림에, 눈가가 '휴 헤프너의 불알'처럼 축 처진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거든요. 그런 칼을 보던 제이콥이 그에게 말합니다.
당신 아내가 바람을 핀 건 당신이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연인으로서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칼의 외모를 완전히 바꿔놓은 뒤에는, 칼에게 (여자와) 대화하는 방법을 가르치죠. 핵심은 이겁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될 필요 없다,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라.
"내가 내 얘길 하던가요?"
"절대. 자기 얘긴 하지 않고 항상 상대방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여자가 흥미로운 주체가 될 수 있게."
그렇게 배운 기술들로 여자를 꼬시고 다니던 칼은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왜 에밀리에게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진짜 관심을 기울여주면서. 어쩌면 당신이 한 눈을 판 건 내 잘못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원하지 않을 모습의 나를, 당신에게 강요하고 있었구나,라고. 학교 학부모 상담으로 에밀리를 만나게 된 칼은 그녀에게 고해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내가 좀 더 잘했었지? 모르겠어. 내가 게을러졌나 봐. 난 재미 없어졌어.
당신한테 화가 나. 당신이 한 일에 정말 화나. 하지만 나한테도 화가 나.
그때 차에서 도망치지 말고 당신을 위해 싸웠어야 했어. 소울메이트는 서로를 위해 싸워주는 거잖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칼은 Womenizer(바람둥이)가 되어 무려 아홉 명의 여자랑 섹스를 하고 왔는걸요. 에밀리는 아홉 명의 여자와 섹스를 한 칼을 용서하고 다시 부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바에 가면 언제든지, 누구라도 꼬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제이콥과 칼이지만 집에서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합니다. 공허함이죠. 제이콥은 그 공허함을 밀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여자를 꼬셔왔지만 그들과 즐기는 건 섹스뿐이에요. 외로움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그렇게 유혹해서 잠자리를 갖는데 누구도 내 이야기를 물어봐 준 적은 없어요. 진정한 소통에 대한 갈증은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 뒤에야 해갈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그때, 픽업 아티스트 제이콥의 공허함을 꿰뚫어 보는 한 여자, 해나가 나타납니다. 해나는 제이콥의 뻔한 Pick up line(유혹의 기술)을 비웃고, 대신 진짜 제이콥의 내면을 알아보고자 하죠.
영화의 진짜 질문은 이겁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바람둥이가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했을 때, 우리는 그걸 믿을 수 있을까요? 무려 아홉 명의 여자와 외도를 한 - 어쨌든 이혼을 한 상태는 아니니까 외도라고 볼 수 있겠죠 - 칼, 그리고 직장 동료와 잠자리를 가진 에밀리는 다시 믿고 의지하는 부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 영화는 사랑의 두 마스터가 서로에게 레슨을 주는 영화입니다. 한 사람은 유혹과 육욕의 마스터이고 한 사람은 오래 참고 인내하는 사랑의 마스터이죠. 둘 중 하나만 할 줄 알아도 충분하다면 좋겠지만 사랑을 유지하려면 둘 다 할 줄 알아야 해요. 우리는 상대를 유혹하는 섹시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그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랑의 마스터가 되어야 하죠.
이렇게 심각한 척 영화를 소개했지만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면서 미소가 얼굴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영화를 '예술적'으로 잘 만들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겠지만,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영화인가 하면 매우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특히, 오래된 연인이나 부부가 시네마테라피의 용도로 활용하면 매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반추해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