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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10. 2020

대한민국 사상 최고의 액션 영화

인 줄 알았는데 사상 최악의 서사를 보여준 농약 같은 가시나, <악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숙희(김옥빈)가 일인칭 시점으로 등장합니다. 카메라 밑으로 보이는 숙희의 손은 번개 같은 주먹 병구 주먹보다 빠르게 폭력조직으로 보이는 인간들을 사이좋게 도륙 내 버립니다. 오프닝 시퀀스를 볼 때부터 예감했습니다. 아, 대한민국에 다시없을 엄청난 작품이 탄생했구나.


<올드보이>의 장도리 씬 이후 최고의 복도 액션. 색감 보이시나요?  출처: 악녀
타격기 뿐만 아니라 유술도 잘하는 숙희  출처: 악녀
배트맨보다 슈퍼 히어로 랜딩도 잘합니다  출처: 악녀


이 영화에 쏟아진 비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존 윅>을 보면서 누가 서사를 찾습니까. 존 윅은 우리가 서사를 찾고 있는 동안 최소한 35명을 죽입니다. 정말 잘 만든 액션 영화는 서사의 약점을 충분히 덮고도 남으니까요. 물론 탄탄한 스토리가 받쳐주면 영화는 또 다른 경지에 이르지만 이 영화는 이미 서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스토리 때문에 영화가 망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오락 영화로서라도 망하기 힘들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읍니다... 진짜 액션은 각본의 미약함을 한탄하지 않습니다.  출처: 부기영화


<짝패>의 스토리가 부실하다고 해서 망작이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액션의 미덕은 호쾌함인데 이렇게 화려한 액션, 얼마만입니까. 알뜰살뜰하게 돈 모아서 폭약이나 펑펑 터뜨리는 액션이 아닌 진짜 액션, <악녀>는 그걸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악녀는 그렇게 망작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던 걸까요?





Scene #1, 훌륭한 오마주와 액션


초반 35분 동안 영화는 눈 뗄 수 없는 온갖 액션을 선보입니다. 일본도를 차고 바이크에 오르는 조직원들과 검투를 벌이는 김옥빈은 걸크러쉬 그 자체였어요. 저는 그때 결심했습니다. 어렵고 심오한 영화들만 호평하는 사짜 리뷰어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겠다. 이 영화의 명예를 위해 영알못을 자처하겠다고요.


복도를 통해 끝없이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버드맨>이 떠올랐고,  출처: 악녀
분장실의 대칭 구도도 멋졌습니다.  출처: 악녀
<킬빌>의 악녀, 오렌 이시이의 과거를 오마주 했고  출처: 악녀
뭐, 물론 원작의 완벽함을 따라가지 못하고 겉모습 흉내에 가까웠지만... 출처: 악녀
오토바이 칼부림은 분명 <킬빌> 그 이상이었습니다.  출처: 악녀


이렇게 엄청난 액션 장면들을 투하했습니다. 초반에도 분명 약점은 보이죠. 서사를 담당하는 숙희의 과거사를 담을 때는 어설프다가 액션만 멋집니다. 똑같이 타란티노 감독의 <킬빌>을 오마주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도 검투는 타란티노에 견줄 만큼 훌륭했고 침대 밑 회상씬은 한참 못 미쳤어요.


그런데, 그 후로 감독은 자신의 장점을 철저하게 감추기로 마음먹습니다.




Scene #2, 사라진 빌런


너는 연수 나는 현수 우린 같은 수! (실제 대사)  출처: 악녀
좋아... 해요. 기다리는 거. (실제 대사)  출처: 악녀
염병들하네엑!  출처: 악녀


감독은 자신의 장기를 꽁꽁 묶고 서사에 몰두합니다.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요? 액션 영화에 액션이 없어요. 액션 영화에서 액션이 없을 때는 거대한 악이 클라이맥스를 위해 빌드업을 해야 하는데,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을 띡 던져 넣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렇게 등장하는데 이중상(신하균)이 강력해 보일 수 있나요? 심지어 숙희는 국정원에서 훈련을 받기 전에도 70명을 도륙 낸 전력이 있는데요.


<범죄도시>와 비교해보면 이 약점은 더 심각하게 보입니다. <범죄도시>는 마동석이라는 인간흉기(..)가 등장하기 때문에, 그에 맞는 빌런을 착실하게 키워왔어요. 체격적으로 보면 장첸(윤계상)이 너무 약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장첸은 가리봉동의 국내파 폭력 조직들을 하나하나 끔찍하게 조지면서 강력함을 선보입니다. 내로라하는 조직들이 그의 무차별 공격에 모두 작살이 나요. 이렇게 장첸의 강력함을 관객에게 주입시켰기 때문에 관객은 마석도(마동석)와 장첸이 1:1로 맞붙었을 때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악녀>는 숙희가 이길게 뻔히 보이잖아요. 초반 35분으로 숙희의 강력함은 관객들에게 각인되었으니까요. 한 시간 동안 어설픈 로맨스를 끼워 넣는 대신 이중상을 키웠다면 영화가 이렇게 허무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Scene #3, 사라진 복수극


정말 놀라운 영화입니다. 단점을 장점으로 덮는 영화는 많이 보았어도, 자신이 가진 최고의 장기를 이렇게 감추는 감독은 처음 봤어요. 대체 시나리오 누가 쓴 거지? 하고 찾아보니 정병길 감독 자신입니다. 그 시나리오,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 다 봤을 거잖아요. 왜 아무도 안 말렸을까요? 스토리는 복잡했고, 대사는 엉성했고, 풀어내는 방식은 게을렀습니다. 더 엄청난 고민이 필요했어요.


영화는 35분을 기점으로 엉망이 됩니다. 죽은 줄 알았던 전남편이 결혼식 전 날 돌아오고, 국정원은 '그냥 임무'라며 숙희에게 전남편을 사살하라 합니다. 끝없는 물음표만 등장해요. 국정원 요원이 숙희 하나인 것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숙희에게 그 임무가 맡겨졌나요? 국정원이 정보기관이라면, 중상이 숙희의 전남편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야 할 텐데? 중상은 숙희가 결혼하는 날 반대편 건물에서 뭘 하고 있었죠? 또, 점만 찍고 돌아와도 못 알아보는 세상에서 성형수술로 메이크 오버까지 했는데, 열악한 CCTV 화면으로 연수가 숙희인 것을 어떻게 눈치챘죠? 아니, 애초에 숙희를 죽이려고 함정으로 이끌었던 중상은 숙희가 살아남았음을 알면서도 왜 숙희를 찾지 않은 건가요?



영화를 망치는 것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는 세 개의 복수가 등장합니다. 아빠 죽인 놈 잡아서 하는 복수, 남편 죽인 놈 찾아서 하는 복수, 아이 죽인 놈 찾아서 하는 복수. 순서로 보면 아빠 1, 남편 2, 아이 3인데,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남편의 복수로 시작합니다. 세 개의 복수 중에서 2개의 복수는 이미 끝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그럼 영화가 루즈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세 번째 복수를 빨리 시작해야 하죠.


그런데 세 번째 복수는 영화가 끝나기 15분 전에 시작합니다. 엥? 그럼 평화로운 시간이 한 시간이 넘어요. 물론 중간중간에 회상을 통해 복수 1과 복수 2를 구구절절 보여주지만 그건 이미 끝난 일이잖아요. '지나간 슬픔에 새로운 눈물을 낭비하지 말자'라는 말도 있는데, 관객이 이미 끝난 일에 무슨 서스펜스를 느끼겠습니까. <킬빌>의 베아트릭스 키도(우마 서먼)도 임신을 통해 평범한 삶을 추구하고 아이를 잃으며 복수를 결심하지만, <킬빌>의 복수는 항상 현재 진행형이었습니다. <악녀>에서 관객은 그냥 영화가 액션을 보여주면 반짝 우와~ 하고, 남는 시간에는 손가락을 빨면서 대체 다음 이야기는 언제 시작하나, 하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중간에 보여주는 액션은 초반 시퀀스의 퀄리티에 반토막이 났어요. 


나 방금 전 남편 보고 왔어.  출처: 악녀
어머~ 우리 공. 주. 님.  출처: 악녀
엄마랑~ 아저씨랑~ 짝짜꿍? (실제 대사)  출처: 악녀


초반에서 한껏 기대치를 높인 영화는 한 시간 동안 로맨스 겸 신파를 찍습니다. 특히 대사의 품질은 최악입니다. 대사를 통해서 대충 상황설명을 하려는 게 너무 뻔히 보여요. 아니 그럴 거면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충분히 주던가, 영화의 강약이 전혀 조절이 안됩니다. 중간에 웨딩드레스를 입고 거대한 저격총을 환풍기 밖으로 겨누는 숙희의 씬은 아주 예술적으로 멋졌지만 그뿐이었어요. 아마 이 장면은 '예쁜 장면을 위해서' 억지로 끌고 간 설정일 겁니다.

 

이건 인정합니다. 웨딩드레스는 이렇게 쓰는 거죠.  출처: 악녀



연출은 연출가에게, 각본은 각본가에게


정병길 감독님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각본까지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 한국 영화, 갈수록 시나리오가 문제라 합니다. 시나리오 작가들이 대우를 못 받고 있대요. 표준계약도 지켜지지 않고 대충 몇백에 계약 넣은 다음에 입맛대로 끝없이 수정시키고, 그 시나리오에 매달리느라 차기작 준비는 물론이고 생계조차 힘들어진 다고요. 그러다 보면 점점 시나리오는 엉망이 되고, 연출 못지않게 중요한 영화의 한 축이 무너진다면 한국영화의 미래는 아주아주 어두워지겠죠...


요즘 글을 아무나(... 저요?) 뚝딱뚝딱 쓰니까 글을 아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도 흥행을 예측할 수 없는 소설 원작이나 순수 시나리오 대신 웹툰이나 만화 등을 영화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고요. 웹툰 시장이 커지고 문화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은 반길 만한 일이지만, 시나리오 작가에 대한 존중과 동시에 그들의 위상도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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