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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19. 2020

가슴 아플 일이 있기 전에, 이쯤에서

30대 된 우리가 사랑이 어려운 이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 애를 내버려 둘 수 없었어.'


착한 남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많은 남자들이, 내게 필요한 사람보다 내가 필요한 사람에게 기웁니다. 쉽게 말해, 그냥 불쌍한 애한테 끌린다는 거죠. (보살핌이 필요한 여자라던가...) 씩씩하고 독립적이고 자기 호불호가 강한 여자들 그렇게 인기 많지 않아요. 내가 챙겨줘야 할거 같고 뭔가 부족하고 내가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요. 그래서 <비포 미드나잇>의 셀린느는 아예 백치미를 연기하잖아요. 남편에게 져주고. 정말 현명한 여성입니다. 그렇게 단순한 남자들하고 맞서 싸우면 피곤하지만 조종하는 건 훨씬 쉬우니까요. 성차별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쓸데없는 기사도 정신으로 가득해서 여성을 보호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에요.


제 생각인데, 오늘 다룰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뿌리가 그 착한 남자 콤플렉스인 것 같습니다. 우리 착한(멍청한) 남자들은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에게 몰입하기 딱 좋았거든요. 착한 남자 콤플렉스는 이름이 착한 남자라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비겁하고, 대단히 쓰레기 같은(..) 놈들이에요.


우리의 착한 남자, 츠네오는 카나에(우에노 주리)에게 큰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남자들이 다 부러워하니까 기회가 생겼을 때 잡습니다. 카나에는 타인의 시선이 만들어낸 사랑이었어요. 카나에는 학교의 슈퍼스타였고, 그녀와 만나게 된 츠네오는 '부러운 자식' '능력 있네' 소리를 들으면서 삽니다. 남들이 다 원하는 것이니 나도 원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감독의 연출에서 이런 게 조금씩 느껴집니다. 조제는 첫 만남부터 호감으로 이동하기까지의 미묘한 상황들을 계속 얹어주지만, 카나에는 딱 하납니다. 예쁘다. 예쁘다. 예쁘다. 이 정도면 그냥 예뻐서 만난 애예요.


우에노 쥬리의 매력 포텐은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터집니다. 꼭 보세요.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렇게 남부러울 것 없는 완벽한 여자 친구가 있는 츠네오는 어쩌다 마주친 하반신 마비의 장애 여성,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에게 끌립니다. 자신은 겪어볼 수 없었을 외로움에서 나오는 조제의 그 독특한 생각과 정신세계가 츠네오를 마구 끌어들여요. 츠네오는 카나에와 조제 사이에서 갈팡질팡 합니다. 이 영화의 주제가 뭐냐고요? 많은 훌륭한 영화들이 그렇듯, 바람과 불륜입니다. (그리고 죄책감)


집에서 책만 읽어서 잡다 지식은 엄청나게 많은 독특하고 귀여운 아가씨, 조제.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그러나 이 영화가 바람 난, 쓰레기 같은 남자의 영화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겁니다. 예술작품의 특성이 그래요. 인간의 삶을 아주아주 자세하게 풀어놓으니 다 이해돼요. 화가 나질 않아요. 그래서 좋은 거죠. 혼란스러운 시기의, 무조건 비난할 수만은 없는 그런 먹먹함으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주니까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저런 혼란함이 느껴질 때, 어떻게 하면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었을까? 더 나아가면, 양다리 걸친 남자의 마음은 대체 어떤 것일까? 굳이 이해해주려고 노력은 안 하셔도 됩니다. 예전 그 자식이 나한테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도저히 잠이 안 온다, 라는 분을 위한 말이에요.



Scene #1, 운명을 믿는 남자의 문제점


심지가 굳지 못하고 이렇게 주변 상황에 잘 팔랑거리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마음이 뭐 대단한 거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자기만 팔랑거리면 되는데 여기 가서도 사랑한다 하고 저기 가서도 사랑한다 고백하며 다른 사람 마음까지 헤집어 놓아요. 츠네오를 볼까요? 거의 개복치예요. 건드리면 죽습니다. 오오 줄리엣, 운명은 왜 이리 가혹한 것인가요?


주인공 인성 수듄...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먼저, 조제의 집에 왕래를 끊고 난 뒤 과 회식 자리에서 한 후배가 조제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입니다. 그 후배가 한 짓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그 후배가 버린 책을 조제의 집에서 보았다는 것뿐이죠. 그런데 츠네오는 이 사건을 엄청난 운명의 장난인 것처럼 혼자 드라마 쓰면서 오열합니다. 그리고 조제에 대한 마음을 부활시킵니다. 운명이니까요. 이렇게 현 여자 친구인 카나에는 밀려났습니다.


조제에게 츠네오를 뺏긴 이후 인생이 망가졌다는 카나에.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두 번째는, 조제에게 조금씩 지쳐 갈 때쯤 담배 판촉 알바를 하고 있는 카나에를 만난 장면입니다. 자, 이번에는 카나에가 불쌍하군요. 츠네오와 그렇게 헤어지고 조제에게 2 연타 불꽃 싸다구를 날렸지만 왠지 진 기분이었거든요. 카나에는 대학도 부질없다며 망가진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운명의 남자 츠네오는 이번에도 나서야죠. 결국 그녀가 이렇게 된 건 나 때문이잖아? 이렇게 현 여자 친구인 조제는 밀려났습니다.


아니, 왜 지금의 연인보다 다른 사람을 더 신경 씁니까.  출처: 우리도 사랑일까


동정의 마음,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 사랑하는(것 같은) 마음을 다 이루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경험이 없으니까 모르는 거예요. 그거 사랑 아니거든요?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고, 무시할 수 있는 싹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츠네오는 조제에게도, 카나에에게도 정착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안달이 나서 그쪽으로 달려갑니다. 이거 병이에요. 주인공 병.


내가 없으면 이 사람들이 다 무너질 거 같은 겁니다. 카나에가 담배 팔며 살고 있다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에 돈이 아주아주 많고 능력이 아주아주 좋은 활력 넘치는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 이상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기껏해야 한 사람을 만족시키고 사랑해주기도 버거워요. 그런데 무슨 자신이 슈퍼히어로라고 조제와 카나에의 행복을 동시에 책임 지려 합니까.


조제 얘기를 듣게 되었어요? 담배 하나 물고서 '하... 시바... 그 사람 잘 살고 있겠지?' 하고서 행운을 빌어주면 되잖아요. 카나에가 나타났어요? '미안하지만 난 마음을 정했다. 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했으면 좋겠어'라고 기도나 해주세요. 그 사람이 심지어 인생 망친 원인으로 나를 탓한다고요? 동정은 돈으로 하세요. 돈 천만원이라도 들고 가서, 이거, 별건 아니지만 내가 그때 당신에게 좀 심했던 거 같아. 하지만 난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걸... 하면 다 받아줄 겁니다. 안 받아주면 돈이 부족한 겁니다. 1억으로 올려보세요.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 사람 죽인 것도 아니고 그냥 다른 여자가 좋아진걸 뭐 어떻게 해. 그런데 부탁이 있어. 나한테 쓰레기 짓 한 번만 더 해줄래?


카나에는 조제의 말을 듣고 다리를 자르는 대신 동정심 유발 작전을 실행합니다.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어떤 사람을 사랑하겠다, 하고 마음먹었으면 그 사람만 사랑하세요. 재산이 뭐 2 조거인쯤 되면 두 사람 사랑해도 괜찮습니다. 그 두 사람에게 1조씩 나눠주면 양다리 걸친다고 해서 불만 가지진 않을 거예요. 그거 아니라면 내가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겁니다. 그 사람도 언젠가 인연을 만나게 되겠죠.



Scene #2, 안 살 거면 만지지 마세요


아 이 자식 또 이 xx이네...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 영화에서 가장 명장면으로 꼽히는 것은 누가 뭐래도 마지막, 카나에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츠네오입니다. 착한 남자 츠네오가 예쁜 여친을 내버려 두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것처럼 보이는) 조제를 안아주러 갔다가, 사랑이 식고 장애에 지쳐 (현실의 벽에 부딪혀) 예쁜 여친에게 돌아온 거죠.


안 살 거면 만지지 마세요. 예? 아, 살지 안 살지 모르겠다고요? 그래서 우리는 '썸'이라는 기간을 둡니다. 썸 타는 동안 숙고해 보시라고요. 지금 내 감정에만 휘둘리지 말고, 이 사람과의 미래는 어떤 미래일지, 내가 그걸 과연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꾸욱, 하고 깊게 자국을 남기는 이유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할 수 없는 거예요. 츠네오가 조제를 처음 만날 때부터 헤어짐을 생각했을까요? 츠네오가 마지막에 오열하는 이유는 죄책감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렇게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게 중요한 건 내 삶이었어. 당신보다 날 더 사랑하네. 미안해.



남녀 관계는 그래서 더럽게 슬픕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가 나이를 하나 둘 먹어가면서 조금씩 배우는 게 있다는 겁니다. 서른 줄에 가까워 올쯤이면 이제 감정이 다가왔을 때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단 즐거움에 몸을 맡기는 대신 그 감정을 분석해보죠. 그래서 사랑이 어려워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계산을 해 보니 당신과 나의 미래가 그렇게 장밋빛은 아니군요. 가슴 아플 일이 있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조심하게 돼요. 그런데, 저번 <이터널 선샤인>을 다룰 때, 사랑한다면 얼음의 두께를 걱정하지 않고 뛰어들 거라고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사랑하고 난 뒤에 그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 모두 소중히 여기자 하던, 클렘과 조엘의 이야기.


깊고 깊은 바닷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 있을 뿐이지.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조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조제는 헤어지고 나서도 그 행복했던 기억으로, 그 경험으로 장애를 딛고 일어섭니다. 조제가 호랑이를 보러 갔을 때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호랑이를 볼 거라고 다짐했다고. 만약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평생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고. 


영화에서 호랑이는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것, 그러니까 세상을 의미합니다. 조제는 깊고 깊은 바닷속에서 혼자 살던 물고기였고,. 세상은 너무 무섭기 때문에 그냥 외롭더라도 혼자 어떻게든 살아나갈 생각이었습니다. 이제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시도해 볼 수 있겠죠. 츠네오와 함께 두려움을 이겨냈으니까.


조제는 아마 츠네오를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츠네오를 만난 그 시간들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조제를 불쌍하게 여기지만 사실 그녀는 불쌍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녀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동정심이잖아요. 말은 저렇게 해도 깊은 상처는 남았을 거라고요? 글쎄요. 그렇게 깊은 상처가 남은 사람이라면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라고 담담하게 말하진 못했을 것 같네요.


이 영화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는 츠네오입니다. 자해라고 하죠. 츠네오는 자기 멋대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 다녔지만, 허망함을 느낄 거예요. 죄책감을 느낄 거고. 아예 그냥 여성을 욕구의 눈으로 보는 바람둥이라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츠네오는 나름 혼자서 드라마 쓰는 친구거든요?


장애를 가진 조제의 기억은 평생을 남아 츠네오를 괴롭힐 겁니다. 제 예감이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후 일 년쯤 지나면 츠네오가 조제를 찾아갈 거라고 생각해요. 펑펑 울면서. 조제는 괜찮다고 말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츠네오를 다시 받아주겠죠. 츠네오는 조제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예전 연인일 뿐이니까. 그가 그렇게 흔들릴 것이란 걸 조제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양가적 감정을 버리지 않고 잡아낸, 아름다운 작품


영화를 보고 나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츠네오에게 실망감을 느낌과 동시에 그 쓸쓸한 연출로 인해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안 살 거면 만지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냐' 생각이 들다가도 '이렇게 신중하게 사랑을 고르다간 평생 사랑에 빠지지 못하겠어' 같은, 양가적인 입장을 보이게 되는 거죠. 영화가 어느 쪽에도 더 무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명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모든 사람이 죽기 전에 꼭 한 번쯤은 봐야 할 영화로 꼽고 있습니다. 스물한 살의 제가 츠네오와 너무 닮아서(물론 생긴 건 제가 조금 낫습니다), 저한테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영화일지도 모르죠. 일본 특유의 투명하고 청아한 그 감성도 영화를 더 멋지게 만들어줘요.


특히 제가 좋아하는 연출은 사진 슬라이드를 활용한 내레이션이었어요. 대충 찍은 것 같은, 흔들린 그 스틸컷의 연속들. 빛바랜, 열화 된 보랏빛 필름의 그 감성. 간간히, 환상적인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조제의 목소리. 오묘한 OST가 끼어들며 삽화로 변환되는 오프닝 크레디트.


빠르게 지나가는 이런 대충 흔들린 컷에서도 느껴지는 갬성.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화이트 밸런스를 낮춰 차갑고 사실적인 색감으로 담았는데 왠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지는 겨울 바다의 햇살. 전갱이 굽는 냄새가 느껴지는 듯한 일본의 낡은 가옥. 흐린 날의 낮은 컨트라스트로 스며드는 주인공들. 그리고 단순한 멜로디로도 마음을 꼭 죄여 오는 적절한 OST까지.



저는 앞으로도 가끔, 생각날 때마다 이 영화를 꺼내 볼 겁니다. 적어도 스무 번은 본 영화, 그러나 아직도 절대 지루하지 않은 나의 인생 영화. 리뷰를 쓰다 보니 츠네오를 까고 싶어 져서 좀 흥분하긴 했는데, 영화를 보면 사실 츠네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사그라드는 사랑의 형태를 치밀하게 잘 구성했어요.


니가 운전 중이면 말을 그따구로 해도 되는고야?  출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끝을 예감하고, 움츠러들고, 담담하게 준비하는 조제와 미안함을 감추고 서서히 이별로 다가가는 츠네오의 모습은 여러분의 눈물샘을 자극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가 말은 이렇게 해도 이 영화 제 눈물 벨이에요. 보기만 하면 눈물 터져요.


꼭 한번 보세요. 연인과 이별하고 실컷 울고 싶을 때 딱 좋은 영화, 착한 남자로 산다는 게 얼마나 나쁜 짓인지 깨우쳐 주는 영화를 찾으신다면 적절한 선택이 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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