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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19. 2020

깨질지 모르는 빙판에 누워, 보이지 않는 별을 찾다

다시 만나 행복할 수 있을까? <이터널 선샤인>


스무 살 때였나요? 이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습니다. 어, 당시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힘들었거든요. 기억이 차라리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쯤에 이 영화를 보고서 펑펑 울다가, 여자 친구를 찾아가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다시는 기억 같은 거 지우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게. 너무 소중한 시간이었거든. 정말. 그 사람은 아마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생각했을 거예요.



지금요? 어휴. 기억하고 싶어도 가물해요. 몇 년 전이야 도대체. 영화를 보고 뭔가 깨달은 것은 있었는지 함께 했었던 모든 사람들, 모든 순간들을 소중히 여겨야겠다 생각했지만 뇌세포가 따라주질 않더라고요. 알코올이 계속, 지속적으로 시냅스를 끊어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각설하고 오늘 영화로 바로 넘어가 보면 이 영화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역작, 입소문으로 재개봉에서 더 대박 친 영화, 코믹 배우 짐 캐리를 정극 배우로 만들어준 그 영화, <이터널 선샤인>입니다. 미셸 공드리, 별로 들어 본 적 없으시죠? 감독의 이후 작품인 <수면의 과학>이나 <무드 인디고>등을 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인가, 해요. 사실 이 영화는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이 정형화된 플롯을 제시해서 감독의 폭발하는 실험정신(..)을 차분하게 눌러놓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카우프만이 없는 공드리는 흥행에서 참패를 거듭합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지질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로맨스 영화인데, 놀랍게도 20대 남자가 가장 많이 보는, 많이 공감하는 영화래요. 제가 20대 때는 원나블이나 보고 있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역씌 대단한 것 같아요. 이 영화는 특히 첫 감상과 두 번째, 세 번째 감상이 달라지는 영화로 유명합니다. 첫 감상에서는 단면적으로 이해되었을 그 내용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더 복잡하게 이해된다는 뜻이겠지요.


이 남자는 적극적인 여자가 팔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눈을 깜짝깜짝 감으며 놀랍니다. 출처: 이터널 선샤인


이 영화를 10번쯤 보면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되나요? 오늘은 그런 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뭐 분석을 해보자면 클레멘타인의 머리 변화, 블루와 오렌지로 표현되는 성격, 채도로 표현되는 클렘과 조엘의 인생 등. 상징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는 굳이 그런 연출적 도구를 빌리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런 분석은 수많은 다른 리뷰들이 잘해놨으니까. 오늘은 정말 순수하게 영화의 메시지에만 집중해보도록 할게요.



Scene #1,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만큼만


<이터널 선샤인>에는 라쿠나사(병원?)가 있습니다. 라쿠나는 라틴어로, "잃어버린 조각"이란 뜻이죠. 그리고 이 병원은 기억을 지워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가? 를 고려해본다면 물론, 저런 파마 기계 끼고서 기억을 지우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때 문제는, 우리는 과연 기억을 지우고 싶을까 라는 것이죠.


파마 기계에 전선이 좀 많네. 출처: 이터널 선샤인



나쁜 연애를 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해요.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나쁜 연인을 선택한 건 당신이고, 어쩌면 그게 당신의 선호일지도 모르는데요. 나쁜 사람이 재수 없게 당첨된 게 아니라 내가 그 나쁜 사람을 선택한 거라면, 그 기억을 지워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같은 선택을 하게 될 텐데. 그리고 똑같은 고통을 다시 받게 될 텐데.



영화는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기억을 지웁니다. 기억을 지우는 그 순간에 조엘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 경험을 다시 해야 해요. 처음에는 좋았죠. 마지막에 그녀를 만났을 때, 술 마시고 새벽에 들어온 그녀에게 불만을 표하다가 그녀가 집을 뛰쳐나갔을 때는 "이 같잖은 러브 스토리에 딱 맞는 엔딩"이라며 소리쳤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니 그들이 권태를 느끼고, 말없이 중국음식을 집어먹는 장면이 나오는군요. 이때까지도 잘 됐다 싶었습니다. 이런 불행한 기억 따위 다 없애 버리자. 그래야 행복할 수 있겠지.


Perfect end for this piece of shit story!!   출처: 이터널 선샤인
우리도 그런 지루한 커플이 되는 걸까.  출처: 이터널 선샤인


하지만 기억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점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녀의 아픔을 듣던 날. 그녀와 함께했던 설레는 데이트. 당장 죽어도 좋아,라고 말하던 그때 그 시절. 조엘은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깨닫고 기억 제거를 중지해달라고 꿈속에서 소리치지만 아무도 듣는 이 없습니다. 제발, 제발 멈춰주세요. 이 기억은 나의 아픔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니까요.


사랑해줘. 조엘.  출처: 이터널 선샤인
여기가 어딘지 봐!  출처: 이터널 선샤인
난 다시 태어나면 저런, 졸라 큰 코끼리가 될 거야.  출처: 이터널 선샤인


재미있는 것은, 우리는 굳이 라쿠나사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똑같은 수술을 해줘요. 먼저, 아팠던 기억들과 괴로웠던 기억들을 먼저 삭제해 버립니다. 보통 이 과정을 담당하는 것은 '외로움'이라는 녀석인데요. 보통은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순차적으로 지워지기 마련입니다만 '외로움'이라는 녀석은 이상하게 취사선택을 해서, 그 사람의 단점과 나쁜 기억들은 싹 다 덮어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겨놓습니다. 헤어진 연인들은 보통 이런 상태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안돼요. 안돼. 싫었던 순간과 괴로운 순간까지 다 기억하고 있으면 몰라도, 좋았던 기억만으로 다시 만나는 건 관계의 도돌이표를 찍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의 인생을 찾고, '외로움'을 어떻게든 극복해내면 시간은 서서히 좋았던 기억에서 감정을 해체하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짜잔, 행복했던 기억들은 감정이 분리된 채 추억이라는 녀석으로 변해 장기 보관함에 들어가요. 이제는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새로운 사랑을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는, 옛 연인과 다시 시작하는 것도 가능해요. 다만 엄청난 노력을 할 경우에.


그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돌아온 연인이 있어요. 받아줘도 괜찮을까요? 아뇨, 절대 안 되죠. 물론 그 사람은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있겠지만 그거 잠깐입니다. 그게 가슴속에 깊게 새겨져서 본능적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2년쯤은 더 필요해요.



Scene #2, 깨질지 모르는 빙판에 누워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때, '두터운'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영미권에서도 익숙한 표현이에요. John legend의 <Ordinary People>라는 곡에서도 사용한 표현이죠.


Girl, I'm in love with you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This ain't the honeymoon (허니문 같은 게 아니고)
Passed the infatuation phase (격정적 사랑의 단계도 지났지만)
Right in the thick of love (우리는 두터운 사랑 위에 서 있죠)


그런데 그 두터운 사랑, 과연 두터울까요?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그리고 금이 가지 않았으면 우리는 빙판이 두껍다고, 깨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 생각일 뿐이에요. 그 빙판이 얼마나 튼튼한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짝 얇아졌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사랑을 하는 것은 당연히 두려워야 정상입니다. 언제 깨질지 알 수 없으니까요. 10년 20년 살아오던 부부들도 수틀리면 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사랑에 빠지면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왜냐고요?


"I could die right now clem. (나,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


빙판이 얇아서 깨질지도 모르지만, 그 얼음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지만 난 지금 행복하거든요.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상대방이 나의 믿음을 배반하건, 깨진 사랑에 빠져 죽던 상관없습니다. 이게 진짜 사랑이에요. 클렘이 말하잖아요. "Do you even care?(그게 지금 신경이나 쓰여?)"


그렇게 두 사람은 찰스강에 누워, 잘 알지도 모르는 별자리를 찾아봅니다. 클렘이나 조엘이나 별자리에는 별로 조예가 없어요. 그래서 서로가 맞는 말을 하는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은 그냥 재잘거리면서 행복한 거죠. 자, 이게 감독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감동이 콸콸콸 쏟아져 내리네요.



Scene #3, Okay, Okay...


영화를 처음 본 사람들은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라 생각합니다. Okay, Okay... 하고 나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행복했을 거라고 믿는 거죠. 이 영화를 보고서 전 연인에게 가서 다시 시작하자고 많이 그래요. 여기서 더 지질해지면 저처럼 술 먹고 찾아가서 울고불고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반복해서 보다 보면, 해피엔딩에 대한 암시보다는 모호한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모두가 꼽는 명장면, Okay. Okay? Okay... 이미지 출처: 이터널 선샤인


영화의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이 가져온 첫 번째 버전의 시나리오에서는 80이 넘은 나이의 할머니 클렘이 라쿠나사로 돌아오는 내용이 있었대요.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를 지우고, 또다시 지우고, 또다시 지우며 계속해서 만나고 있었던 거죠. 행복했던 기억도 슬펐던 기억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워내는 거예요. 클렘이 말하잖아요. "나는 당신을 지루해할 거고 당신은 날 한심하게 생각할 거예요. 지금은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간 그렇게 될 거예요. 우리는 그랬고 또다시 그렇게 될 거라고요."


기억을 지워도 사랑은 남아있지만, 그 권태 또한 다시 오게 마련입니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연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이유로 다시 헤어져요. 둘 사이에 있었던 그 문제점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깊게 반성했다고 하면 어쩌면 다시 만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굉장히 낮아요. 차라리, 헤어질 정도로 잘못한 것이 있으면 다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을 누르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괴로움으로 한없이 반성하며,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어쨌든, 새로운 사랑은 또 당신을 찾아올 테니까요. 준비가 되었을 때.


그래도 사랑한다면 다시 시도해봐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럼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최악의 순간들을 치열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잠깐 방심하면, 내가 잠깐 노력하지 않으면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망이 될 수 있는지 기억해야 해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까지 잊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입니다. 작중에서 메리는 망각을 예찬하며 "아이들은 모두 순수하고 자유롭고 깨끗한데 어른들은 슬픔에 찌들어 있다."라며 모든 걸 잊어야 한다고 하죠. 하지만 자신의 실수까지 잊으면, 개선은 누가 하죠? 불의 뜨거움을 모르는 아이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사랑의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다시 사랑해 봐야 또다시 실패할 뿐입니다.


만약 좋았던 기억은 다 사라지고, 나쁜 기억만 남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사랑에 혐오를 느껴 버리겠죠. 너무 아픈 기억만 남아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기억을 소중하게 여겨야 해요. 사랑이 내게 줄 수 있는 행복을 기억하고, 방심이 불러올 재앙을 두려워하고. 오직 기억하고 모든 사랑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사람만이, 조금씩이라도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영화는 이렇게 복잡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모두 담고도 1시간 40분밖에 되지 않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단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정신 차리고 보면 이미 영화가 끝나 있어요. 효율적이고 완벽한 시나리오(그리고 콘티)가 아니었다면 이런 작품, 못 나왔습니다. 연출 보세요. 조엘이 친구에게 오늘 아침에 서점에서 있었던 얘기를 하는데 거기서 돌아서 걸어 나오자 뒤에서 불이 쾅쾅쾅 꺼지면서 친구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조엘의 뒤로 서점의 불이 쾅쾅 꺼지다가  출처: 이터널 선샤인
문을 지나치자 친구의 집으로 변화합니다. 너무 편안하게 복잡한 과거 얘기를 해냈어요. 출처: 이터널 선샤인


서점에서 다시 만나는 신을 볼까요? 조엘과 클렘이 대화하는 사이에 배경의 책들에 내용이 모두 지워집니다. 백지로 채워져요. 이제 곧 서점에는 내용 없는 글, 깨끗하게 비워진 공책만이 남을 겁니다. 연출 아주 끝내줍니다. 뭐 상징을 엄청나게 끼워 넣지 않아도, 영상 문법 같은 거 몰라도 직관적으로 머리에 채워져요.


기억이 지워진 조엘의 도서관.  출처: 이터널 선샤인


티 없는 마음에 내리는 영원의 빛 (Eternal sunshine of a spotless mind), 이 영화의 원제입니다. 그런데 이쯤 되면 궁금해집니다. 티 없는 마음이라는 것은 가능할까요? 메리가 말하는 대로, 기억을 지우면 티 없는 마음이 될 수 있을까요?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이 아름다운 사랑을 했던 시절의 그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빛으로 채워지며 화이트 아웃 처리를 해버려요. 행복했던 그 한 소절 버혀내어 영원히 메아리치면 영원한 햇살이 깃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요? 감독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불가능할  듯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질투하고 싸우고 원망하면서 지저분하게 사랑해야 할 것 같아요.


행복한 한때만 추억하며.  출처: 이터널 선샤인


그래도 그 사이에 피어나는 사랑은 아름다운 녀석이겠지요.

영원의 빛은 없어도 됩니다. 티 없는 마음은 영화라는 꿈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어요.

이별의 괴로움, 그리고 권태를 느끼는 연인들에게 이 영화는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겁니다.


모두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행복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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