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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Oct 12. 2023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삶, [버드맨]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스스로에게 물었을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왜 살까? 궁극적, 궁극적으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슨이나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같은 석학의 의견을 따르면 인간은 DNA가 스스로의 보존을 위해 선택한 '운반책'일 뿐이라 합니다. 대부분의 개인은 스스로가 특별하다 믿고 나의 존재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역사 안에서 개인의 영향은 미미한 수준이니까요. 우리는 모두 잊혀질 것입니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인간은 관계를 위해서만 삽니다. 인간은 관계 안에서만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는 굉장히 재미있는 생명체입니다. <인터스텔라>의 만 박사(맷 데이먼)는 아무도 모르게 존재가 지워질 위험이 닥치자 그것이 올바른 행동이 아님을 알면서도 구조대를 부르고, <패신저스>의 성길이는 혼자 우주를 여행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멀쩡히 자고 있는 캣니스를 깨워 삶의 우울함을 채웁니다. <프로메테우스>에서도 혼자 깨어있으며 승객들을 돌보는 것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였었죠. 인간을 홀로 지내게 하는 것은 엄청난 고문이니까요.


사실 혼자있기 심심해서 널 깨웠어. 미안.  출처: 패신저스


옛날 옛적 라틴어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라고 믿었던 미치광이 과학자가 아기에게 아무런 언어도 가르쳐주지 않고, 아무런 관계도 맺게 하지 않으며 음식물만 제공하며 아이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는지 지켜본 일이 있었다는군요. 그 추론 과정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으니, 사실 그는 과학자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사람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 아기는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관계 없이는 살지 못해요.



우울증 환자가 가장 많이 호소하는 괴로움은 다름 아닌 외로움입니다. 아무에게도 진정으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라는 생각은 인간의 생존 의지마저 꺾어버리죠. 어떤 사람들은 연예인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뭐가 그렇게 괴로워서 죽음을 택했을까, 라고. 하지만 다수의 얕은 관심은 근원의 외로움을 조금도 덜어주지 못합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죠.


사람들은 누구나 페르소나(Persona)를 내세워 자신을 보호하지만, 연예인의 경우에는 여기서 이상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페르소나가 너무나 강력해져서 자신을 삼켜버리는 것이죠. 사람들은 (심지어 나와 가까운 사람들조차) 최진리를 보고 있으면서 인간 최진리가 아닌 설리를 봅니다. 설리와 최진리는 다른 사람인데 사람들은 내게 계속해서 설리이기를 강요합니다. 너, 일반인 아니잖아. 너 설리잖아. 너, 그걸로 유명해졌고 그걸로 돈 벌었잖아. 그럼 설리로 살아야지.


그런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은 '최진리로서 사랑받고싶다' 라는 생각이지 않았을까요. 온전한 나로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것. 최진리는 설리가 받는 사랑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더 외롭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참, 연예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돈과 명성이 '진짜 나'를 가리고 내게 다가오는 사람을 현혹하기 때문에.


인간은 외로울 때 죽는대요. 누구 하나라도 그녀의 한숨을, 존재적 외로움을 듣고 있었다면, 혼자가 아니라고 확신을 주었더라면 그녀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지도요.


그녀의 선택을 사회가 '어리석은 선택' 이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고 존중해주었으면


(최근 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정윤석 감독이 (故)최진리의 이야기를 담은 '진리에게'를 출품했다고 하는군요. 그녀의 엄청난 팬이었다곤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를 만나보고 감상을 적어보고 싶습니다.)



영화, <버드맨>은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당신은 이 삶에서 원하던 것을 얻었나요? 당신은 무엇을 원했나요?

그러자 리건이 답합니다. '내가 지구상에서 사랑받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

레이먼드 카버의 연극, 'Late fragment'의 이 문장은 아주 강한 울림을 남깁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저마다의 목표를 가지고, 돈을 벌고 차를 사고 성공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왜 하는걸까?



리건에게도, 스타의 딜레마가 찾아옵니다. 그는 연기를 하기 위해 '버드맨'이라는 페르소나를 뒤집어 썼는데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리건 톰슨'이 아닌 버드맨으로 봅니다. 버드맨이 아니면 사랑받을 수 없는 거죠. 심지어 버드맨으로서 받는 사랑은 그에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는 페르소나가 없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입니다. 그는 배우 '리건 톰슨'으로 단 한번도 사람들 앞에 나선 적이 없습니다.


SNS 계정조차 없는 이 늙은 배우는 딸(엠마 스톤)에게 '쥐뿔도 없는 쓰레기'라는 소리나 듣습니다. 사실 그녀의 말이 맞아요. 요즘 세상에는 SNS가 없으면 존재하는 유령이나 다름 없습니다. 정말요? '유명인'의 관념 안에서는 그럴지도 모릅니다. 헐리우드는 끊임없이 관심을 갈구하는 관종들의 집합체니까요. 딸은 그에게 '당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건 예술이 아니라 본인이 건재함을 증명하고 싶은 것' 이라고 독설을 날립니다. 


그는 이제 마지막으로 증명을 해 내야 합니다. 연극을 통해, 그가 버드맨이 아니라 리건 톰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아직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요. 버드맨의 망령은 계속해서 그 주위를 멤돌며 넌 아무것도 아니라 하고, 평론가는 그를 짓뭉개기 위해 이를 갈고 있습니다.


이카루스의 비상과 추락을 나타내는 오프닝 직후, 사만다와의 통화를 끝낸 리건이 맥북을 닫자 거울에 붙은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A thing is a thing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 “남들이 어찌 평하느냐가 아닌, 실제 무엇이냐가 진짜다.”






이 영화, '심각한 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너무 흥미롭습니다. 구성과 연출이 너무 대단했어요. 

캐스팅에는 팀 버튼의 '배트맨'으로 끗발을 날린 마이클 키튼을 '버드맨'으로



그리고 얼마 후 이 배우는 '스파이더맨:홈커밍'의 '벌쳐'가 됩니다.


'파이트 게임' '25시' '프라이멀 피어' '아메리칸 히스토리X'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등에서 소름끼치는 연기력을 보여준 에드워드 노튼을 천재 배우 '마이크 샤이너'로 캐스팅 (실제로도 미친 연기력의 소유자이자, 연기와 영화 예술에 대한 철학이 매우 확고한 마이크 샤이너 그 자체)


자신의 '스토리'를 훔쳐 마치 자기 이야기인 양 꾸며낸 마이크에게 내리는 응징


그리고 엠마 스톤과 나오미 와츠까지, 화려한 캐스팅과 단단한 주제의식으로 가득찬 이 영화는 영화 전체를 원테이크로 (사실은 몇번 이어붙인 편집점이 있지만) 촬영해버리는 '미친 짓'을 감행해 버립니다. 마치 영화 전체가 연극처럼, 굉장히 빠른 템포로, 숨쉴 틈 없이 진행됩니다. 롱테이크로 유명한 '올드보이'의 장도리씬, '칠드런 오브 맨'의 7분 30초 가량의 롱테이크도 이 정도는 아니였죠.


'극중극'의 구조와 환각, 환상을 현실과 이어붙여 한번에 모든 의도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다회차 관람을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도리어 새로운 연결과 해석을 만들어줍니다.


이런 다양한 요소로, 아카데미에서 쟁쟁한 후보로 오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보이후드' '이미테이션 게임' '인터스텔라'를 모두 제치고 4관왕을 휩쓸었죠. 거의 '기생충'에 필적하는 업적이랄까요.


이 영화에 대한, 그리고 결말에 대한 해석은 너무 다양해서 어느것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도 다른 분들의 해석을 읽으면서, 모두가 고개가 끄덕여지는 결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특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스토리가 가지고 있는 의미나 상징에 대해서는 관객들의 해석에 맡기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잘나가던 왕년의 슈퍼히어로 ‘버드맨’인가?

사랑 받고자 팬티바람으로 브로드웨이를 달리는 한물 간 배우 리건인가?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걸음마도 떼지 않은 아기부터 임종을 앞둔 노인까지

그 누구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받고 싶다’라는 근원적 욕망.


‘사랑받고 싶다’라는 욕망은 원초적이지만 혼란스럽습니다.

진짜 사랑받는다는게 뭔지, 정의를 내릴 수 없으니까요.

대중이 보내는 일방적 관심도 사랑인지, 가족과의 소중한 일상이 사랑일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도 그 정의를 제대로 몰라

SNS에 삶을 과시하고 주목을 얻고자 관종을 자처하고

아름다운 외모와 돈, 그리고 권력을 갈구합니다.


이 질문은 아마 ‘버드맨’ 뿐만 아니라 우리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겠네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답을 찾지 못했나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답은 없으니까요. 읽고 배워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은 전달되지만, 지혜는 전달되지 않는다 했습니다.

잠시만 바쁨을 멈추고, 돈 벌 궁리를 하지 않고, 인생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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