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방식으로 보기 - 존 버거
어쩌면 고급 포르노
옷을 걸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유화를 본 기억이 다들 있을 것이다. 유난히 서양의 회화에서는 누드화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신화 속 상징적인 인물들이 몸이 잘 드러나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식이다. 존버거는 수많은 누드화 중 여성의 누드화에 주목한다. 실제 사람이 취하기에는 너무나도 불편한 포즈를 취하는 회화 속의 인물들이 마치 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과거 회화에서 여성의 누드화의 비중은 지나치리만큼 그 숫자가 많으며 그림 안에서도 그 역할이 남성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 존버거의 주장이다. 그리고 현재의 광고나 사진에서 과거의 여성 누드에서 사용했던 구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사례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어릴 적 책이나 미술관에서 본 누드화가 너무 야하게 느껴져서 스스로에게 ‘이건 야한게 아니라 멋진 예술작품이야’ 라고 속으로 말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선생님들도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곤 했었다. ‘얘들아 이건 예술작품이야’)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와 의식 사이에 괴리감은 내가 품은 불순한 생각이 나쁜 것이며, 미술이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 줬던 것도 같다. 하지만 존버거는 말한다. ‘이건 남자들 보라고 만든 그림에요. 거의 포르노에 가깝죠!’ 서양의 누드화를 어떻게 보던 이 말은 제법 시원한 구석이 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던 하지 않던 시각적 정보와 인지적 정보의 괴리가 어느 정도 해소되는 기분이 드는건 나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유화 : 벽에 걸리는 SNS
기름에 물감을 섞어서 그리는 기법을 흔히 유화(oil painting)라고 부른다. 고대부터 존재했던 유화가 어느 시점부터 미술의 형식으로 선호되었던 것은 무엇보다 탁월한 묘사가 가능해서였다. 풍경, 여자, 음식, 지휘가 높은 사람들, 신화적 사건들은 유화로 그려졌을 때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3차원의 조각보다도 더 사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공작이나 백작 같은 높은 직위의 귀족들의 벽을 빽빽하게 걸려는 수많은 유화들은 감상을 위해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빈틈없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가문의 이름나 인물들과 자신의 정부, 진귀한 물건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정물화, 소유하고 있는 드넓은 땅과 저택들, 농노들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을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가장 빛나고 멋진 순간들의 묘사는 마치 오늘날의 SNS를 연상시킨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신념도 시도도 없다. 무엇보다 사실적으로 소유자의 삶을 과시하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셀 수도 없는 유화가 남아 있지만 우리가 흔히 ‘걸작’이라고 부르는 유화가 생각보다 많지 않은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그렇담 유화의 전통적 시각방식이 흔들리기 시작한 인상파, 입체파 이전의 작품들은 별 볼 일 없는 것일까? 렘브란트, 엘 그레코, 조르조네, 페르메이르, 터너 등을 언급하고 특히 렘브란트의 두 작품을 소개하며 그림을 그리는 시각의 전환이 어떻게 걸작을 탄생시키는지 직관적으로 우리에게 소개한다.
오늘날 가장 사실적으로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은 사진이다. 사진이 나타내는 이미지는 사실 그 자체를 포착 했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유화의 특징은 사진과 신기할 정도로 닮아 있는데 현재의 사진과 과거의 유화를 비교하면서 읽어 보는 것도 재미있는 방법이다. 존 버거가 SNS를 통해 유화의 신화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걸 본다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광고의 시제는 미래
존 버거가 바라본 광고는 어땠을까?? 마지막 챕터에서 그의 시선은 유화에서 광고로 옮겨 간다. 현대 사회에서 광고를 접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광고를 지나친다. 오늘날의 ‘본다’는 행위에서 광고를 빼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광고는 예술작품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이야기할 거리들이 많이 숨어있다.
과거 유화가 그렸던 것은 현재의 모습으로 남겨진 유화는 대대로 전해지며 가치를 내뿜었다. 반면 광고가 그리는 것은 미래의 시제뿐이다. 현재의 결핍을 투영하여 상품을 소비하면서 얻게 될 미래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 광고의 목적이다. 광고는 미래 시제로 얘기하지만, 그 미래의 달성은 끊임없이 연기된다. 광고의 본질은 진실성이 아니라 환상에 있다. 광고는 끊임없는 백일몽이다. 덕분에 우리는 끊임없이 갈망하고 욕망하며 소비한다. 현대 사회에서 결핍과 공허함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이런 소비문화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당신의 주변에 광고를 보기 힘들다면 높은 확률로 사회주의 국가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당신의 주변을 광고가 가득 메우고 있다면 당신은 높은 확률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사회주는 강력한 힘과 권위로 국민들을 통제하고 그들을 욕망마저 제단 한다. 그렇담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국민의 힘으로 정치인을 선출하고 개인의 선택이 모여 국가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물론 이건 이론적인 이야기다. 현실은 많은 국가에서 정치는 무관심의 영역이다. 혹은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지만 국가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국민들이 있다. 광고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광고를 통한 끊임없는 욕망과 선택의 강요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 좁아진 선택의 폭을 인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인생을 주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의 꿈은 우리의 숫자만큼 많다. 하지만 우리는 광고의 숫자만큼 꿈을 꾸고 소비하고 선택한다. 이 또한 거대한 백일몽이다.
Ways of Seeing
어떤 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리적인 형태는 정해져 있지만 시각적인 정보 이외의 것을 더하게 되는데 이를 테면 같은 오로라를 바라보더라도 과거의 사람은 절대자나 신화적인 사건을 떠올리겠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태양풍과 자기장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식이다. 또한 비슷한 예술작품 이더라도 작업의 대상을 어떻게 선정하느냐, 작업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에서는 여러 시대적 배경과 사회문화를 통해 시각적인 정보를 벗어나 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아카데믹한 예술의 평가와 감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보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물론 어떤 이미지에는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고 진짜 중요한 것은 이미지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의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자꾸만 그림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지를 누군가는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작가는 우리에게도 일부 키를 양보하고 있다. 이제부터 이렇게 보는 방법을 바꿔보자 라는게 작가의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본다’ 라는 행위를 정의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진짜 목소리 일것이다. ‘Ways of Seeing’ ,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책의 이름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작가의 의도처럼 틀에 박힌 해석에서 벗어나 이미지를 소비하고 감상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가져보는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