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목화솜 피는 날>
아직도 생생한 그날이 벌써 10년 전이 되었습니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그날의 아픔을 기리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특별전을 열었는데요. 그중에서도 <목화솜 피는 날>은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제작된 극영화입니다. 단순히 세월호를 연상케 하는 영화가 아니라, '안산', '단원고등학교', '세월호' 등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직접적인 영화죠. 참사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극의 요소를 통해 그려내는 영화 <목화솜 피는 날>을 전주에서 만났습니다.
목화솜 피는 날
When We Bloom Again
'병호'와 '수현'은 꽤 괜찮은 부부 사이였다. 그러나 10년 전에 참혹한 사고로 둘째 딸을 잃고, 각자의 고통을 견디느라 서로를 외면해 왔다. 그러던 사이, 딸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었던 '병호'는 점차 기억을 잃어간다. '수현' 역시, 무기력함만 커진다. 그런 '수현'은 첫째 딸의 참아왔던 두려움을 듣게 된다. "아빠마저 잃을까 봐 두려워." 무기력에 갇혀있던 '수현', 그런 그녀에게 남편인 '병호'를 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다.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감독: 신경수
출연: 박원상, 우미화, 최덕문, 조희봉 외
<목화솜 피는 날>은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남겨진 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을 견뎌냅니다. 누군가는 이별의 원인에 집착하고, 누군가는 이별 자체를 회피합니다. 누군가에겐 몰아치듯 밀려오는 슬픔이 누군가에겐 서서히 차오릅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의 눈에는 그 방식이 과격해 보이기도, 무심해 보이기도 합니다.
집착과 회피, 과격함과 무심함. 우리는 이것이 정상 범주의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 비상등을 켠 자동차와 같다는 것을요. 비상등은 정상 주행에 어려움이 있음을 안내하는 표시입니다. 비상등을 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동차에 탄 사람뿐입니다. 자동차 밖의 사람은 비상등을 켠 이유도, 비상등을 끄지 않은 이유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운전자가 비상등을 끌 때까지, 거리를 유지하며 주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는 비상등의 불빛을 종종 외면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도 살기 퍽퍽한 것이 삶이라지요. 그래서인지 감히 그들의 고통을 평가 절하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정상 주행에 방해된다며 얼른 비상등을 끄라고 강요하고, 이제는 비상등을 끌 때가 되었다고 종용합니다. 버젓이 비상등을 켜고 있는데도, 정상 주행을 하지 않는다며 나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화솜 피는 날>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비상등을 켜고 달리는 사람들을 비춥니다. 섣부른 강요와 종용 대신 인내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비상등을 눌러 끌 때까지, 다시 정상 주행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 전, 세월호 10주기를 추모하는 의미로 마련된 영화 모임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날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죠.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에서 그날의 충격과 마주했습니다. '전원 구조' 뉴스에 한시름 놓았던 것도, 믿기지 않은 오보 소식을 접했던 것도,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던 선체의 모습이 뇌리에 박힌 것도, 모두 같았습니다.
역대 최악의 오보였던 '전원 구조' 뉴스 화면이 등장하는 장면은 저를 2014년의 그날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틈날 때마다 뉴스 화면을 새로고침했던 그날, 창문에 매달린 아이들을 생중계로 지켜봐야 했던 그날, 배를 버리고 팬티 바람으로 도망치던 선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날. 심장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멍해지고, 자꾸만 소름이 끼쳤습니다. 영화 속에서 다시 재생되고 있는 10년 전 그날이 너무 말이 되지 않아서, 너무 허탈해서, 너무 무력해서.
엔딩 크레딧에는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304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이름은 한 반에 열댓 명씩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널따란 갑판, 좁고 기다란 복도, 출렁이는 파도, 배 안에서 했던 불꽃놀이, 만약을 대비해 착용한 구명조끼까지. 그날의 일은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만 빼면 제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와 같습니다. 부모님은 잘 다녀오라며 배웅해 주셨고,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도행 여객선에 올랐죠. 그날의 사고는 어쩌면 저에게 벌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꾸만 소름이 끼쳤던 건, 살아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정말로 '운'이었다는 걸 계속 실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목화솜 피는 날>의 에필로그에서 '병호'는 세월호를 견학하러 온 학생들에게 사고의 원인으로 꼽히는 문제들을 하나씩 읊어줍니다. 듣다 보면, 머릿속에서 '고작'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맴돕니다. 고작 그런 문제 때문에, 고작 그런 말 때문에, 고작 그런 결정 때문에…. 세월호 참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2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세월호 참사를 극영화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이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유가족 당사자도 아닌 사람들이 감히 세월호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화솜 피는 날>은 극영화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으로 세월호를 다룹니다. 세월호 참사를 단순한 소재로서 어물쩍 이용하지 않고, 유가족, 자원봉사자, 진도 어민 등 참사 이후 남겨진 다양한 사람들을 비춥니다.
종종 '이 장면은 유가족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에는 세월호 유가족이 꾸린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배우들도 보였고, 제작 및 촬영에 참여한 '2학년 O반 OO 아버지', '2학년 O반 OO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목화솜 피는 날>만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유가족들과 충분한 논의가 이뤄졌음을 유추할 수 있었죠. 어쩌면 더 많은 사람에게 그날을 잊지 않게 하는 이러한 접근이야말로 비상등을 켜고 천천히 주행하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있어 주는 행동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꽃이 진 후에도 솜이라는 두 번째 꽃을 틔우는 목화를 떠올리며, 부디 안녕들 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