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펜서>
실제 인물을 소재로 하는 영화의 감상 포인트 중 하나는 배우가 그 인물을 얼마나 잘 재현해내는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외모는 물론, 말투, 표정, 의상, 걸음걸이까지, 익숙한 배우의 외형에서 실제 인물의 특징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죠.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연기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저도 모르게 외형적 유사성을 먼저 따져본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대보단 우려가 앞섰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현장 사진을 보았지만, '왕세자비'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어딘지 모르게 잘못 끼워 맞춘 퍼즐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올해 들어 했던 걱정 중에 단연코 가장 부질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누구도 크리스틴 스튜어트보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여정 위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완벽하게 연기해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영화 <스펜서>에서 만난 크리스틴 스튜어트 표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소개합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3월 11일(금)에 진행된 <스펜서> 시사회에서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스펜서>는 2022년 3월 16일 국내 개봉했습니다.
스펜서
Spencer
절망스러운 듯 고개를 파묻은 '다이애나'의 모습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가 모종의 대비를 이루는 압도적인 포스터는 개봉 전부터 소셜 미디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이 장면은 왕실의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온 '다이애나'가 화장실에서 속을 게워내는 모습이죠. <스펜서>는 영국의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가 왕실 가족들과 별장에 모여 보내는 크리스마스 연휴 3일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가족들과 보내는 연휴는 편안해야 마땅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실의 연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연휴를 보내기 위해 별장에 도착하면 우선 모든 왕실 사람들은 몸무게를 재야 합니다. 불어난 몸무게로 연휴를 즐겁게 보냈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거든요. 마음대로 창밖을 볼 수도 없습니다. 사진 한 장 건지기 위해 별장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파파라치를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죠. '다이애나'는 창밖을 보며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해보려 하지만, 수행인은 윗선의 지시에 따라 별장의 커튼을 박음질해버리고 맙니다. 음식 하나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고, 옷 하나도 마음대로 입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휴일을 불편해하는 것은 오직 '다이애나'뿐이죠.
갑갑함을 느끼는 '다이애나'는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왕실 생활에 대한 속내를 진솔하게 드러냅니다.
There’s the past, the present, future.
세상엔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
Well here, there is only one tense.
여긴, 오직 하나의 시제뿐이야.
There is no future.
미래가 없어.
Past and the present are the same thing.
과거와 현재는 곧 같은 것이지.
'다이애나'의 말처럼 왕실의 현재는 곧 왕실의 과거입니다. 재미로 시작한 과거의 행동(몸무게 재기)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현재의 관습으로 남는 곳이 바로 영국의 왕실이죠. 몸무게 재기 전통은 왕실이 실체가 없는 의례만을 따르는 곳임을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영화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는 왕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왕실의 의례에 거부감을 느끼는 '다이애나'의 심정만을 착실히 뒤쫓습니다. 덕분에 영화는 단 3일의 시간만을 다루면서도, 관객이 '다이애나'가 왕세자비로서 겪었을 그동안의 고통을 제대로 통감하도록 장치하죠.
<스펜서>에는 두 명의 왕세자비가 등장합니다. '다이애나'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앤 불린'입니다. '앤 불린'은 '다이애나'가 동질감을 느끼는 과거의 인물입니다. 왕실에서 버려져 결국 사형에 처해진 비극의 왕비죠. 둘은 남편인 왕세자가 외도를 저질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이애나는 왕세자의 불륜을 묵인하는 왕실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만 그녀의 환영을 목격합니다.
왕실에서는 과거가 곧 현재인 만큼, '다이애나'도 자신이 '앤 불린'이 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앤 불린'의 환영은 오히려 '다이애나'가 과거의 전통만을 따르는 왕실의 굴레를 끊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환영에서 그녀를 옥죄는 왕실의 전통, 의례, 거짓, 그리고 이로 인한 정체성 상실에서 벗어나라는 무언의 외침을 듣습니다. 결국, 그녀는 왕세자가 선물한 진주 목걸이를 끊어버림으로써 왕실에서의 탈출을 결심합니다. 진주 목걸이는 왕세자가 '다이애나'와 그의 내연녀에게 동시에 선물한, 왕실의 부정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죠.
왕실로부터 버려지는 대신 왕실을 직접 벗어나는 것을 택한 '다이애나'. 그녀는 하기 싫은 꿩 사냥에 억지로 나선 아이들을 데리고 별장을 나섭니다. 그들이 탄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마이크 루더포드와 크리스토퍼 닐의 'All I need Is A Miracle'. 그녀에게 기적이란 참으로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죠.
현재가 없던 왕실에서 스스로 현실을 개척한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 '스펜서'를 되찾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 자체가 그러하듯 오직 '다이애나 스펜서'에게만 주목하는 영화입니다. '다이애나'의 감정 변화만을 오롯이 담아내기 위해 노력하죠. 흔치 않은 여성 원톱 영화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주인공으로서 해내야 할 몫을 착실히 해냈습니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털털하고 반항적인 이미지는 왕실의 규율 안에서 위태롭게 버텨내는 '다이애나 스펜서'를 만나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합니다. 미국 출신인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영국의 왕세자비를 연기하기 위해 입 모양을 아예 바꾸고, 악센트 코치와 발음을 연습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습관과 소통 방식을 익혀 완전히 그녀 자신이 되려고 노력했다고도 밝혔고요. <트와일라잇> 시리즈로만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접하신 분들이라면, 이 영화를 통해 그녀의 색다른 모습을 느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덧붙여, 이 영화는 포스터만큼이나 훌륭한 영상미를 자랑합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찍은 클레르 마통 촬영감독이 필름으로 찍은 영상은 관객이 1990년대에 무사히 안착하도록 돕죠.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마치 매 컷이 완성도 있는 사진 작품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답니다.
극 중에서 '다이애나'는 천 년 뒤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해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녀의 삶을 비극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지 고작 1년 만에 파파라치를 피하다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영화는 그녀의 삶을 '비극으로 끝난 다이애나 스펜서'가 아닌 '비극에서 벗어난 다이애나 스펜서'로 기록합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이야기를 다룬 여러 작품 가운데 이 영화가 특히 돋보이는 이유입니다.
왕비가 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찾기로 결심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새로운 이야기 (출처: 씨네21)
감독: 파블로 라라인
출연: 크리스틴 스튜어트, 샐리 호킨스, 티모시 스폴, 숀 해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