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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까 Sep 05. 2022

엄마 탓 아니야, 내 탓도 아니고

영화 <경아의 딸>

2022년 8월,  불법촬영물 유포자가 검찰에 기소됐습니다. 1만 개 이상의 불법촬영물을 유포했으며, 이는 올해 적발된 사례 중 가장  규모라고 합니다. ‘또’라는 말도, ‘가장 큰 규모'라는 말도 화가 납니다. 이런 뉴스가 그리 놀랍지 않을 만큼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한 이 세상이 정말 두렵습니다.


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감상한 영화 <경아의 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자행되는 대한민국의 디지털 성범죄 현실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언제쯤이면 이런 이야기가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에피소드로 남을까요? 씁쓸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경아의 >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습니다.


경아의 딸
Gyeong-ah’s Daughter

현실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법한 소재를 다룬 <경아의 딸>은 일면 현실을 생생하게 묘사한 다큐멘터리 같기도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바로 직전에도 불법촬영물 유포에 관한 뉴스를 맞닥뜨렸으니까요. <경아의 딸>을 만든 김정은 감독은 GV를 통해 영화가 충분히 현실에서 벌어질  있는 일이라 확신했다"고 밝혔습니다. 딸 ‘연수'의 전 애인이 유포한 불법촬영물을 엄마인 ‘경아’가 받은 것처럼, 가족에게 불법촬영물이 유포되는 경우를 자문 단계에서 다수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성범죄 가해자의 70%가 전 애인과 같이 친밀한 관계의 사람이라는 통계 자료는 이미 유명하고요.


여성은 연애하는 것만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가능성에 노출됩니다. 사실 여성으로 태어날 때부터 여러 범죄의 가능성에 노출된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도 사회는 익숙하게 피해자를 탓합니다. 극 중 ‘연수'는 경찰을 비롯한 여러 사람으로부터 “합의 하에 찍은 영상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질문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안은 여성을 향한 질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영상을 유포한 것이 문제인데도, 사회는 여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립니다. 엄마 ‘경아'마저 “왜 그런 남자를 만났느냐”며 ‘연수’를 탓하기만 하죠. 아주 작은 질타 거리만 있어도 여성은 애먼 공격을 받습니다. 논점을 오도하는 손가락질을 수없이 겪으며 자라왔기에, 러닝 타임 내내 마음속에 일렁이는 공감과 울분을 억눌러야 했습니다.




<경아의 딸>은 디지털 성범죄를 소재로 하는 영화, 더 나아가 여성이 피해자로 등장하는 여러 영화와 분명한 차별점을 갖습니다. ‘연수'가 전형적인 피해자성을 탈피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말이죠. 피해자가 된 ‘연수’도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고립을 택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책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습니다. 영화도 그녀가 괴로움에 몸부림치거나 오열하는 장면을 일부러 보여주지 않죠. <경아의 딸>이 피해자가 다시 '살아내는' 과정에 집중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김정은 감독은 <경아의 딸>이 “피해자가 아닌 한 사람의 존엄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감독의 말처럼 ‘연수'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매 순간 용기를 냅니다. 겨울 끝에 언제나 꽃 피는 봄이 오듯이 ‘연수'는 잠시 멈추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흘러가기를 택합니다. 봄을 향해 걸어가는 ‘연수’의 모습과 함께 흘러나오는 엔딩곡 ‘눈 오는 밤'은 성차별의 세상에서    살아낼 용기를 내는 현실의 ‘연수'들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영화 제목이 <연수>가 아닌 <경아의 >인 것도 이 작품의 차별점입니다. 제목처럼 영화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중요하게 묘사합니다. 엄마 ‘경아'와 딸 ‘연수'는 꼭 어디엔가 존재할 것 같은 사실적인 모녀입니다. 이마트 장바구니에 바리바리 음식을 싸주는 엄마의 모습이나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영상 통화를 하며 자취방 구석구석을 보여주는 딸의 모습이 그렇죠. 아마 K-딸이라면 영화를 보면서 ‘아, 우리 엄마도 저러는데.’,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네.’ 싶은 장면들이 있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연수'는 불법촬영물 유포 사건만으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든데, 엄마는 ‘연수’에게 더 큰 짐을 지워줍니다. K-엄마의 고정적인 멘트를 내뱉으면서요. “다 내 탓이다. 내가 너를 잘못 키웠다.” 엄마의 자책이 딸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엄마들은 모를 겁니다. 아니, 어쩌면 엄마들은 알면서 저런 말을 뱉는지도 모릅니다. 자책은 딸에게 속상한 마음을 전하는 너무나 쉽고 간편한 방법이니까요.


‘딸이 최고'라는 말, 한 번쯤은 들어보셨지요? 부모를 잘 챙기는 건 아들보다는 역시 섬세하고, 친근하고, 착한 딸이라면서요. 그렇기에 K-딸들은 착한 딸로 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꾸만 비밀을 늘리면서도요. 그러니 '잘못 키웠다'는 말이 비수로 날아와 꽂힐 수밖에 없죠. 김정은 감독은 영화의 제작 배경을 설명하며 “내게 이런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장 두려울 것 같은 대상이 이상하게도 나를 가장 잘 이해해줄 것 같았던 엄마였다"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기묘하게도 엄마와 딸은 제일 가깝고도 먼 사이입니다.


‘경아’도 과거 남편에게 부당한 성관계를 요구 받고, 동네 사람들의 입소문에 오르내리는 등 성차별로 인한 고통을 겪은 적이 있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관념에 잠식된 그녀는 언젠가 남편에게 들었던 “걸레 같은 년"이라는 말을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딸에게 쏘아붙이고 말았죠. 그러나 ‘경아'와 ‘연수’는 결국 디지털 성범죄의 고통을 함께 겪으며, 애증의 모녀 관계를 해소할 첫 발걸음을 뗍니다. 자기 잘못을 참회한 '경아'가 '연수'에게 사과를 건넸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딸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경아'가 현실에도 존재할까요? 딸에게 용기 있게 사과를 건넨 ‘경아'가 엄마에게 단 한 번도 사과받지 못한 K-딸들의 마음속 응어리를 조금은 해소해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이 세상의 모든 ‘경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저 나와 연대해주세요. 우리에겐 당신의 연대가 무엇보다  힘이 됩니다.




<경아의 딸>은 불법촬영과 모녀 관계부터 성차별과 여성 노동까지 여성의 삶에 관한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익숙한 얼굴의 김정영 배우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하윤경 배우의 탁월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언제든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영화, 그래서 더 공감이 가는 영화, <경아의 딸>이었습니다.


Summary

홀로 살아가는 ‘경아’에게 힘이 되어 주는 유일한 존재인 딸 ‘연수’는 독립한 뒤로 얼굴조차 보기 어렵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진 남자 친구가 유출한 동영상 하나에 ‘연수’의 평범한 일상이 무너져 버리고 이 사건은 잔잔했던 모녀의 삶에 걷잡을 수 없는 파동을 일으킨다. (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Cast

감독: 김정은
출연: 김정영, 하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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