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아이돌그룹 르세라핌(LE SSERAFIM)의 노래 'UNFORGIVEN'을 아시나요? 이 노래는 유명한 서부 영화 음악을 샘플링하여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노랫말과 비트 아래에 익숙한 멜로디가 깔려 있음을 눈치챌 수 있죠. 강렬한 휘파람 소리로 시작하는 원곡은 한 번 들으면 모두가 알만한 영화 <석양의 무법자>의 영화음악입니다.
원곡을 만든 이탈리아의 음악가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는 설령 영화는 알지 못해도 모두 한 번쯤 들어보았을 영화음악을 셀 수 없이 많이 만들어 내며, '영화음악의 창시자'라고 칭송받은 위대한 음악가입니다. 그리고 영화에 숨결을 불어 넣는 음악을 만들었던 그가, 이제 영화가 되었습니다.
"오, 이 음악은!", "앗, 이건?"하며 놀라는 사이에 156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마치 15분처럼 훌쩍 흐릅니다. 영화를 사랑한다면, 영화음악을 사랑한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의 돌비 프리미어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2023년 7월 5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The Glance of Music, Ennio
의사를 꿈꾸던 어린 엔니오 모리꼬네는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트럼펫을 연주하며 순수음악을 만들다가 우연히 영화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였죠. 탄탄한 음악적 재능과 노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도전을 거침없이 시도한 그는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영화음악가로 거듭났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에는 감미롭고 아름다운 선율도 많지만, 소음으로 들릴 법한 음향도 자주 등장하는데요. 당시는 신경에 거슬리는 음향을 음악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엔니오 모리꼬네는 뛰어난 음악성으로 고정관념을 뒤집는 매력적인 음악을 만들어 냈죠. 그야말로 천재적인 음악가인 셈입니다. 의사를 꿈꿨던 엔니오 모리꼬네를 음악의 길로 인도한 그의 아버지의 선구안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위대한 음악가 한 명을 만나지 못할 뻔했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도전과 개성을 꼽을 수 있을 만큼, 엔니오 모리꼬네는 오리지널리티가 뛰어난 음악가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음악가로서 그는 감독에 따라, 영화에 따라 음악의 색을 바꿀 줄 아는 카멜레온 같은 음악가이기도 했죠.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에는 생전 그와 함께 작업했던 유명한 영화감독들이 줄지어 등장해 각각의 케미스트리를 뽐내는데요. 서부극, 치정, 스릴러, 로맨스까지 각양각색 장르의 향연 속에서도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은 한결같이 그 영화의 한 끗이 되어줍니다. 그래서인지 그와 함께 작업한 영화계 인사들은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에 출연해 하나같이 엔니오 모리꼬네가 만든 음악을 흥얼거리며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영화를 완성하는 한 끗을 찾았는데, 저라도 기쁘지 않을 수 없겠더군요.
단순히 그 장면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한 주제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냈던 엔니오 모리꼬네. 폭력적인 장면에 강렬한 음악을 더하기보다는 완전히 다른 관점의 음악을 갖다 붙이는 식이었습니다. 영화가 단순한 시청각 자료를 넘어 관객의 마음을 파고드는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그의 음악이 촉매제가 되어준 셈이죠. 장면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능력은 영화음악가로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꼬네와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 음악이 삽입된 영화를 번갈아 보여주며 그의 음악 인생을 톺아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요. 삽입된 자료들이 단순한 ‘영상’이 아니라 하나의 ‘영화’로 느껴졌던 건 단연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덕분이었습니다. 과연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없이 그 모든 영화가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겁니다. 그의 음악이 빠진 영화는 말 그대로 푸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돼버리니까요. 서부극 세대가 아닌 저도 '서부극' 하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과 함께 말을 타며 총을 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곤 했던 이유, 그것이 바로 영화음악의 힘이었습니다.
이제껏 영화를 감상하면서 영화음악을 너무 등한시한 건 아닌가 많이 반성했습니다. 영화의 3요소는 분명 내러티브, 영상, 그리고 음향인데 말이에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영화에서 음악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질 낮은 음악이라고 평가받던 영화음악을 이러한 경지로 끌어올린 것 역시 엔니오 모리꼬네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습니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음악과 함께 흘러가는 한 사람의 인생사를 그리는 작품입니다. 누군가의 인생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요? 세상에는 특별하지 않은 인생은 없기에 인생을 고스란히 담아낸 다큐멘터리 영화는 특별한 영화적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참 재밌게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을 관전하면서 양가적인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천재였습니다. 피아노를 두드리지 않고도 책상에 앉아 종이와 연필만으로 머릿속 악상을 음악으로 그려 낼 줄 아는 사람이었죠. '저런 사람이 바로 천재구나. 나는 절대 천재가 될 수 없겠다.' 범주는 다르지만,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허탈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엔니오 모리꼬네의 삶에는 배울 점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정규 앨범이 덜 팔린다고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적 아이디어를 실험할 좋은 기회로 여기는 긍정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매일 같은 일상에서도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발굴해 내는 창의적인 음악인이었고, 영화음악도 곡 자체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마인드로 음악을 만드는 자긍심 있는 영화음악가이기도 했죠. 태생적인 한계에서 비롯된 허탈함을 허물어 버리는 위대한 창작가를 향한 존경심이 피어올랐습니다. '재능', '천재'라는 단어가 오히려 그를 가두는 족쇄처럼 느껴졌다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엔니오 모리꼬네가 음악 속에 녹여낸 주제들은 서두에서 소개했듯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음악가가 그들만의 버전으로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극 중에는 그의 음악을 두고 "Reference constantly"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정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창작자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요?
많은 사람이 베토벤, 모차르트에 견주는 희대의 천재라고 칭송하는데도 신인 감독들과 작업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진정한 '마에스트로', 엔니오 모리꼬네. 영화를 보는 동안 경험했던 전율의 순간들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이번 주엔 나 홀로 '엔니오 모리꼬네 영화 주간'을 가져봐야겠습니다.
전 세계가 사랑하는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 그가 직접 들려주는 명작 탄생 비하인드. 그리고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이 이야기하는 그에 대한 모든 것. (출처: 씨네21)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출연: 엔니오 모리꼬네, 클린트 이스트우드, 쿠엔틴 타란티노, 한스 짐머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