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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Feb 15. 2019

나쁜 기지배, 부숴버릴 거야

남편이 유치해야 할 때

무엇을 놓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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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니 서운하네. 우리가 사적인 얘기 못할 사이였던가요? 솔직히 과장님도 알고 있잖아요. 예전 같지 않다는 거.”


순간 울컥한 나는 세련되게 돌려 말하기 따위 포기하고 바로 본론을 내질렀다.


“과장님이 이렇게 반응하니까 되려 내가 당황스럽네요.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프로젝트가 바뀐 것도 아니고 팀원이 바뀐 것도 아니고 전부 그대로인데 뭐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건 무슨 동문서답이지? 대화할 의지가 1도 보이지 않는 고구막막함에 더 이상의 답문은 생략하기로 했다.


선 그은 것 까진 좋은데
선을 넘지는 말았어야지

나에게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진심이라면, 싸운 적도 없이 이렇게 마음이 멀어지는 게 가능한 일일까? 정말 그 이유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그녀는 나에게 답을 알려줄 마음이 추호도 없어 보였다. 같이 사는 남편 속도 때때로 모르겠는데, 몇 달을 안 만난 사람 속을 어떻게 알겠나 싶어 나도 포기했다.


그녀는 업무를 할 때도 묘하게 내 심기를 건드렸다. 단톡방에서 내가 아이디어를 내면 은근히 반대 의견을 던졌고, 누가 해야 할지 애매한 업무를 자연스럽게 나에게 미루기도 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내가 지각한 날 일어났다. 물론 지각은 하면 안 되는 게 맞지만 다행히 회사도 지각에 대해 어마어마하게 엄격하지는 않았다. 지각뿐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업무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알아서 하라’는 분위기였다. (설마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다닌 건 아니겠지?)


그날따라 일찍부터 카톡 알림이 울렸다. 광고주가 급건을 요청했다는 내용이었다. 확인해보니 이미지만 있으면 모바일로 처리할 수 있는 건이길래 카톡으로 이미지만 전송해달라고 단톡방에서 도움을 청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P가 “그냥 제가 할게요”라며 나섰다. 아무래도 내가 걸어가며 모바일로 하는 것보다 사무실에서 PC로 하는 것이 더 안정적일 것 같아 “고마워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날 퇴근 후, P로부터 카톡이 왔다.


“과장님, 하나 말씀드릴게요. 과장님 공석이 생기면 제가 대무를 하잖아요. 정말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이유로 대무를 하게 되는 점에 대해서는 과장님도 심각하게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사실 아침에 누구나 일어나기 힘들지만 내가 다니기로 한 회사니까 다 이겨내고 약속한 시간에 오는 거잖아요. 과장님도 다시 오셔서 일하기로 본인이 결정한 사항이니 앞으론 오늘 같은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기가 나서서 대무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걸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부분은 내가 명백히 사과할 문제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메시지에는 분명히 짚고 넘어갈 부분도 있었다. 나는 지각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다니기로 한 회사니까 다 이겨내고 ~ 과장님도 다시 오셔서 일하기로 본인이 결정한 사항이니’ 이 부분은 과장님께 들을 이유 없는 말 같아요. 이런 얘기 들으니 과장님한테 혼나는 거 같고 기분이 좀 그렇네요. 저는 팀원들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는 입장인 게 맞지만 도를 지나친 훈계를 들을만한 사원도 아니라는 점 기억해주세요. 과장님 말마따나 우리 사적인 얘기 할 사이 아니잖아요. 대무는 앞으로 신경 쓰시지 마세요.”


과장끼리 왜 이래
아니, 알바한테 왜 과장질해요

퇴사 전, 직급은 같았지만 그녀는 내 팀원이었다. 그리고 내가 퇴사한 뒤 그녀는 내가 하던 일을 맡게 되었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다시 왔어도 모두가 나를 여전히 ‘과장님’이라 불렀고 내가 P의 팀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것까지 따져보게 되다니 유치했지만 그만큼 분했다.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동급끼리 근태 문제를 언급하는 건 ‘싸우자’는 뜻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래, 내가 괜히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어.


그런 생각이 들자 오늘 밤을 새워서라도 남편에게 P의 만행을 낱낱이 고하고 싶었다. 아주 그냥 신나게 유치해지고 말 테다!


“나쁜 기지배, 부숴버릴 거야.”


이것은 내 대사가 아니다.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회사 생활에서 불만을 얘기할 때면 남 탓을 하기 전에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먼저 생각해보라던 남편이었다.


“아니, 너랑 친했다면서 널 그렇게 모른대니? 그렇게 크게 심기가 뒤틀릴 사건이 있었다면 말을 해주든가. 눈치도 없는 애한테 그게 무슨 고문이야. 못된 말 세련되게 하려고 궁리하다가 주름살만 하나 더 늘 거다!”


가끔 내가 남편이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저렇게 유치뽕짝인 못된 말을 서슴없이 하다니. 하지만 신기하게도 남편이 그렇게 유치를 떨어주자 내 사기가 꺾였다.


“오빠, 걔도 뭔가 사연이 있겠지. 오빠 말대로 내가 눈치가 없으니까 언젠가 나도 모르게 뭔가 크게 잘못했다 믿자.”


그렇게 오히려 남편을 달래고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상하게 자꾸 킥킥 웃음이 나왔다. 앞 뒤 안 가리고 내 편을 들어준 남편이 웃기고 귀여워서. 그리고 고마워서. 진짜로 P에게 주름살이 생기든가 말든가 그건 이미 내 알 바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르바이트 기간이 끝날 때까지 P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업무에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마무리도 깔끔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이 일로 인해 나는 상대가 하찮게 생각하고 바닥에 내팽개쳐버린 내 진심을 도로 주워주려고 등을 굽히는 순간, 상대방은 내 등을 내려다보며 더 우습게 생각할 수도 있음을 배웠다.


앞으로 또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내가 그에게 애정이 남아있다면 정중하게 말할 것 같다.


“지금 땅에 떨어진 거 너한테도 소중한 거면 얼른 주워.”


라고.


그가 스스로 줍지 않으면 그 마음은 절대 다시 그의 주머니로 들어갈 수 없음을 이젠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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