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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Jun 27. 2022

연애가 없는 삶     

결혼이 내게서 빼앗아간 유일한 것

독일 뮌헨의 BMW박물관에서


8년 전 추석 연휴에 나와 남편은 독일로 여행을 떠났다. 추석과 휴가를 붙여 2주 가까이 되는 일정이었고, 양가에 이번 추석은 우리끼리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겉으로는 패기 넘치게 선포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에 눈치가 보였었다.


그런데 공항에 와 보니 생각보다 (부모님 없이) 가족단위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 놀랐다. 그 해 추석이 예년보다 좀 길었던 기억인데, 우리처럼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어쨌든 기왕 떠나기로 했으니 알차게 즐겨볼 계획이었다. 그 여행은 다른 여행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매번 자유여행으로 유럽을 다녀왔으니 일정을 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도전이 있었다. 바로 독일 내에서의 이동을 렌터카로 하는 것. 아기자기한 독일의 소도시들을 가보고 싶은 곳들만 골라 속속들이 다녀볼 요량이었다. 물론 성공은 했지만 그 과정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꿈도 야무졌지.



여행답지 않았던 여행의 순간들

가끔 반 박자씩 늦는 구글 내비게이션과 영어 표지판에 의지해 낯선 도로와 신호체계에 적응하기에도 벅찼기에 우리는 늘 '추천경로'를 선택했다. 직접 해보기 전에는 호젓한 국도를 구비구비 여유롭게 누비며 목가적인 독일의 시골 풍경을 눈에 담는 장면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추천경로는 늘 어김없이 아우토반. 말로만 듣던 아우토반을 시속 200km에 가깝게 질주해보는 짜릿함을 즐기기에는 우리가 렌트한 '피아트'로는 힘에 부쳤다. 오후 시간대에 동쪽으로 향할 때는 더 곤욕이었다. 방향 전환 없이 그대로 해를 마주 보며 내도록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대체 '예쁜 길'은 어디서 빠져서 어떻게 가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기차나 고속버스와 다를 바 없는 노선을 그대로 따랐다. 그래서 매번 도착지에 내려서야 겨우 독일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결혼 후의 사랑은 고속도로와 닮아있다. 분명 나는 독일에 있는데 한국에서와 다를 바 없는 도로 위에 신호등도 없이 무조건 직진이다. 연애할 때는 프랑스처럼 낭만적이어서, 독일처럼 반듯해서, 이탈리아처럼 자유로워서 사랑했던 이 남자가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올라타자마자 평범한 풍경으로 펼쳐진다. 내비게이션을 보면 문제없이 목적지로 보다 빠르게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창밖을 보면 여기가 어디쯤인지 대체 알 수가 없다. 너무 빨리 지나쳐버리기도 하고, 함께 달리는 차들과 속도를 맞춰야 주행방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앞만 보기에 바쁘다. 그래서 중간중간 머무르는 목적지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 목적지까지 가는 도입까지도 낭만적이면 더 좋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반면 연애는 내비게이션에도 잘 나오지 않는 해안도로, 시골길, 가끔 고라니가 출몰하는 오솔길로 인도한다. 커브를 돌면 어떤 풍경이 나타날지 이렇게 가면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자체가 여행이 되는 설렘이다. 그럴 때는 운전대를 잡은 사람도 전방주시만 하기보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있고 충동적으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내려 낯 간지러운 바람을 쐬며 들꽃이 나부끼는 사소한 모습에 함께 깔깔대는 이벤트도 생긴다.


연애할 때의 과정을 힘겹게 기억해보자면  그런 모습이었던  같다. 함께하는 미래보다 지금  순간에  집중하는 마음이 때로는 로맨틱한 기대를 만든다. 오늘 데이트의 끝에 어쩐지  사람이 나에게 사귀자고 고백할  같다는 직감. 이번 주말에 만났을 때는 아마도 손을 잡지 않을까 하는 상상.   누구도 먼저 가본  없는  여정에 모든 예측 불가능한 것들이 두려움보다 환희가 되는 관대한 마음. 그걸 막상 연애 중인 사람들은 '불안'이나 '불확실성'이라고 치부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아마 연애가 2주간의 휴가처럼, 주어진 시간이 끝나기 전에  도착해야 하는 목적지가 있는 입장에서 정확한 방향을 인지하지 못하고 드라이브만 계속하는 답답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타고 있는 나에게는  길은 어느 인터체인지로 나가야 있는 것인지 도무지   없는 미지의 세계.  길을 지나고 있는 당신이 때로는 몹시 부럽다는  모르겠지.


함께하는 것도 함께하는 곳도 중요해

결혼생활이 보장하는 사랑의 모습은 명확한 방향성과 일정한 속도다. 당신이 낭만적인 시골길을 '헤매고' 있는 동안 문제없이 잘 닦여진 전용도로를 '질주'하고 있다는 안도감.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시기에 따라 이제는 빠르고 정확한 루트를 선택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다. 나 또한 너무 늦지 않게 이 길에 들어선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한 번 고속도로를 타고나면 국도로 다시 나가는 건 '샛길'로 빠지는 것이 된다. 부부가 함께 피로를 풀고 머리를 식히는 곳은 그러라고 만들어 둔 휴게소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찍부터 휴게소를 즐기는 법을 개발해두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커피를 사 마시는 것 외에도 휴게소 뒤편으로 만들어둔 작은 산책로를 걷거나 한켠에 놓인 나무 의자에서 지금까지의 여행을 함께 복기하는 담소를 나눈다. 그러면 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나갈 힘이 생긴다. 차를 버리고 도보로 저 울타리만 건너가면 우리가 마음속에 묻어둔 생경한 풍경에 대한 감동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엉덩이 탈탈 털고 손 잡고 일어나 다시 차로 향한다. 우리가 함께 가기로 한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그 설렘이 궁금하고 그립더라도, 거기에 한 눈을 팔아 자칫 한 명이 낙오하게 될까 봐 남편은 더더욱 꼭 핸들을 붙들고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내비게이션 좌표를 쫓는다.


당신의 연애가, 당신의 사랑이 지금 어디쯤인지 궁금할 때 꼭 이 이야기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지금 함께하고 있는 이가 다시 출발할 생각이 없거나 돌아가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해가 지기 전에는 혹은 2주 안에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의향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면,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천천히 두 사람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모습들을 음미하며 순간을 즐겨보라고 말하고 싶다. 나를 비롯한 많은 결혼한 이들이 상상으로만 가는 그 길 위에 서 있지 않은가. 고속도로에 올라타는 건, 빠져나갈 길이 없더라도 괜찮다 싶을 때쯤, 이 사람과는 끝까지 함께 가도 나쁘지 않겠다 싶을 때쯤. 그 때여도 늦지 않다.


오늘도 나는 남편과 연애의 설렘을 듬뿍 담은 드라마를 함께 보면서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부러운 감정을 서로의 존재에 대한 감사함으로 다독이며 이 사람이랑 함께라면 잠시 앞만 보며 목적지향적으로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남편은 슬그머니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다음 휴게소에서 어떤 간식을 사줄지 이야기를 꺼낸다.


- 내가 설레게는 해줄 수 없지만 행복하게 해 줄게.


이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옆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내려 다시 국도를 타겠나. 게다가 난 초보운전인데!

연애는 맘껏, 사랑은 듬뿍, 결혼은 조금 천천히, 그리고 조금 늦었다 싶은 인생의 목적들이 있다면 결혼하고 나서 전력질주하면 된다. 풍경 대신 옆에 앉은 사람을 보며 가는 길도 나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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