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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 Nov 16. 2023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그동안 고생했다. 내년부터는 DX대학 업무를 맡게 될 거야. AI대학원에도 보내주는 조건이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특별히 널 추천해서 보내는 거니까 일도 공부도 잘해봐.”

아래 단락 내용을 주고 전화를 받던 순간의 느낌을 표현해 달라고 요청해 봤다 (DALL-E)

 

2020년 겨울, 연말 셧다운 기간 중 당시 리더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일방적이었다. 분명 좋은 의도였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그해 겨울 “좋은 기회”라는 단어로 포장된 업무 변경이 있었고, 5년 전 R&D 직무 교육에 회의감을 느껴서 연수원으로 이동을 택했던 나는 다시 직무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전 담당자로부터 업무 인수인계를 받았다. 성격대로 히스토리부터 회사 별 담당자 연락처와 노하우까지 잘 정리된 정보들을 공유받았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책임님께 이 일을 맡기고 혼자 빠지게 되어서 정말 죄송하네요.”

 

나 이전에 이미 회사의 지원으로 대학원 공부를 마쳤고, 조직 내부적으로는 데이터 분석도 제법 한다는 얘기가 많이 들리던 사람의 말이기에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나처럼 문과 출신으로서 업무 장면에서 마주하는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말하는 AI 기술과 코드, 수학, 통계 이야기 그중 무엇하나 쉽지 않았기에 점점 더 자기 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주변에서는 데이터 전문가인 것처럼 보는 시선이 내심  부담스러웠다는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던 당시 그의 페이스북 프로필 상에는 스스로를 소개하는 단어 중 하나로 “데이터 분석가"라는 단어가 있었다가 졸업하는 시점에 슬며시 그 단어가 지워졌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누군가로부터 듣게 되었는데 아마도 약간의 후련함을 담아 전한 솔직한 이야기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와의 대화 중에 연구소 조직에서 HRD 업무를 담당하면서 별나라 이야기만 같던 R&D 직무 교육을 수년동안 기획, 개발, 진행하면서 ‘지금 다루는 이 내용들이 시간이 지나도 내 것은 아니겠구나’ 했던 지난날의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제가 일은 어떻게든 개인적으로 공부해서 잘 해낼 수 있는데 굳이 대학원까지 꼭 가야만 할까요?” 

 

전임자와의 대화를 통해 연수원에서 진행하는 직무 교육에 대한 이미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도 있었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딸아이의 출산을 불과 보름 정도 남긴 시점이었기에 나는 인사 담당자와 티타임을 핑계로 뭐라도 쉬운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

 

“저는 이미 석사학위가 있기도 하고, 다음 달이면 아이도 태어나고 업무와 육아를 병행하다 보면 학교까지 다닐 여력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평소 친분이 있는 인사 담당자였기에 내 모든 사정들은 하나하나 공감받을 수 있었지만 그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조직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기에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좋은 기회"를 거스르면 내 다음에 같은 기회가 있을 때에 누군가 진짜로 공부를 하고 싶어도 그 길이 막힐 수 있다는 이야기로 자연스레 나를 굴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여러 학교들의 커리큘럼을 비교해 가며 홀린 듯 입학 원서를 쓰게 되었다.



두 번째 석사 학위에 도전하다

 

그렇게 입학한 AI/Big Data MBA 과정 기간 동안의 주경야독은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를 배우는 것만 같았다. 수학과 통계, 파이썬 기본, 머신러닝, 딥러닝 등등의 수많은 과목들을 배우고 있었지만, 각 과목에서 마주하는 용어와 개념들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대충 졸업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지는 것은 또 못 견디는 희한한 성격 탓에 매 주말마다 부모님 댁에 아이를 맡기고 이어지는 수업과 평일 밤 아이를 재우고 보낸 시간들을 차지한 과제들은 쉼 없는 도전이었던 것 같다.

 

SSM AI/Big Data MBA



“교육 참가자들의 진짜 속마음을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들기만 했던 Course work 과정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논문 주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변화가 찾아왔다. 내 이전에 회사의 지원을 받아 먼저 공부한 후배들과 학교는 다르지만 졸업 논문이나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하나 같이 데이터가 없어서 공공 데이터를 하나 정해서 예측 모델을 만들거나 혹은 딥러닝으로 구현해 보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배우는 내용도 어렵고 재미가 없는데 논문까지 그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대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돌이켜 보면 아마도 교육학 석사 논문을 쓸 때, 이미 원형탈모가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봤기에 이번에는 좀 달랐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러면서 내 업무 장면에서 수집되는 데이터들을 적극적으로 관찰하게 되었고, 마침내 매 교육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그들이 남기고 가는 차가운 교육만족도 평가 점수와 솔직한 의견 간의 관계를 살펴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을 때,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진짜 공부를 하게 된 것 같다.  (포스팅을 시작하게 된 계기이기도 한 논문 데이터 분석 과정과 결과 내용은 후에 다른 글들을 통해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주제에 대한 깊은 관심은 어렵게만 느껴지던 이론들을 실제적이고 흥미로운 문제 해결의 도구로 바꾸어 놓았고, 교육생들이 남긴 데이터가 말하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면서, 진짜 필요한 내용들을 찾아가면서 주도적이고, 이기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이 재우기 담당으로서 아이가 잠든 밤 9시경부터 새벽 1~2시까지 집중적으로 논문 작성을 하는 강행군이었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재밌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해 내 졸업 논문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최우수 논문 선정에 대한 부분은 논문 심사를 진행한 교수님께서 모든 졸업생들 앞에서 공표하신 내용이었으나 졸업식을 앞두고 스위스 본교에 확인한 결과 본교에서는 따로 최우수 논문 시상 제도가 없다고 하여 막상 졸업식에 실제 수상 과정이 따로 없어 아쉬웠다.)



내 주변에 잠자고 있는 데이터를 찾아서

 

그렇게 졸업을 하고 나니, 더 이상 과제나 시험의 부담 없이 마치 다가올 연휴에 가보고 싶은 여행지를 찾듯 새로운 분석 과제를 찾는 즐거운 노력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도박판에 갓 입문한 초심자의 행운 같은 시기이겠지만 어쨌든 주변의 데이터를 관찰하고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제법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물론 전혀 나이스 하지 않은 부족하기만한 분석 역량 탓에 매 순간은 좌충우돌과 우당탕탕의 연속이었지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일상의 업무 데이터 속 패턴과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그 안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다 보니 정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작업들을 진행하게 된 것 같았다.



“변화와 성장을 돕습니다.”

 

Notion 프로필 페이지의 첫 줄에 적어둔 문장이다. 십수 년 간 HR 업무를 담당하면서 공들여 준비하고 진행한 프로그램을 통해 사내 외 다양한 장면에서 마주한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들이 우리네 표현으로 담당자로서 뽕이 차오르는 순간인 것 같고, 앞으로도 그 뽕에 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데이터를 활용해서 HR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을 People Analytics라고 부르든 HR Analytics라고 부르든 간에 앞으로 HR 담당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공들여 데이터를 들여다봐야 하는 것은 단순히 하면 좋은 방식이 아니라 HR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일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러자면 누군가는 나처럼 등 떠밀려 학위 과정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고, 학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알음알음 공부해서 자기 노트북 안의 엑셀 데이터를 이리저리 만지면서 좌충우돌하게 될 텐데 그런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 역시 여전히 일적으로 만나는 많은 전문가 분들께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데이터에 대한 분석 방법과 내가 생각한 인사이트의 논리적 구조 같은 것들을 번번이 물어보고 있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프로젝트 수행 단계에서 마주했던 고민의 포인트나 실패 경험들을 잘 정리해 둔다면 비슷한 길을 걷고자 하는 누군가에게는 지름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 경험들을 정리하고, 기록해 보려고 한다.



“솔직히 그때는 공부가 정말 하기 싫었는데, 지금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데이터 기반으로 일하는 큰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주에 내가 몸담은 조직의 CEO분과의 비정기 면담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여쭤보시기에 저 말씀을 드리고 나왔다. 그럴 리 없지만 회의록을 작성해서 저 문장만 놓고 본다면 누군가는 굉장히 조직 지향적인 말로 마무리했네 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의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담아 공부할 기회를 주신 리더분께 담백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 이런 고민을 하면서 어렵지만 재밌게 일하고 있을 줄 알았더라면 일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2020년 겨울 그 전화를 받았을 때, 난 뭐라고 반응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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