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89일 차, 20200614
아무도 모를 형식을 고집하는 고지식한 사람. 그런 형식을 이 일기장에도 계속 유지해 왔다. 오늘은 그냥 아무런 형식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손가락이 자판을 누르는 대로 목에서 차마 튀어나오지 못할 말들을 쓸어 뱉어보려고 한다.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밤을 지나서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 오만가지 생각이 하룻 밤새 더욱 자라서 뿌리가 더 깊게 내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혹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눈앞에 주어진 일들을 해나간다거나. 밤에 내려앉은 잡초 씨는 해가 뜨기 전에 뽑아버려야 한다. 어둠을 지나고 그 뿌리가 굵어지기 전에.
6월은 어려운 달이다. 항상 어려운 달이다. 특히나 독일에서의 6월은 더욱 그러하다. 짜증나게 비도 잦고 춥기도 하면서 덥기도 한 날씨에 어느 장단에 맞추어서 마음을 준비시켜야 할지도 모르겠고, 한때 친했다고 생각한 친구들은 그냥 술만 퍼마시고 놀기만 했던 표면적인 친구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면서 소중한 사람들에게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재떨이에서 떨어지지 않는 담배꽁초 잿가루의 흔적처럼 구린내 풀풀 풍기면서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소중한 사람들이 내 구린내 맡고 역겨움 느낄까 봐 막상 다가가지도 못하는,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한없이 후회하고 또 추후 후회할 것을 아는 것 같으면서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 그런 오락가락한 달이다.
얼마 전에 만난 친한 독일친구는 내가 지난 몇 년에 비해서 여유 있고 마음이 편해 보인다고 한다. 당연하지. 얼마나 열심히 연기를 연습해 왔는데. 이제 사람들 앞에서 내 본래 감정을 한 꺼풀 뒤로 숨기고 살아가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비결은 나의 원래 어색하고 아니꼬운 표정이다. 평소에도 계속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정말 어색한 일이 있거나 불편한 일이 있을 때에 사람들이 정말 내가 어색하고 불편해하는 것인지 아니면 평소처럼 그냥 무표정으로 있는데 아니꼽게 보이는 건지 잘 구별하지 못한다. 조심해야 할 점은 기분 좋을 때다. 기분 좋은 때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생기고 목소리에 생기가 돌기 때문이다. 이를 제일 경계해야 하는데, 사실은 이마저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대놓고 말하자면, 한국이 그립다. 무엇이 그리운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속 깊숙이 올라오는 그리움이 아무도 모르게 다가오는 독일의 여름처럼 천천히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한없이 나약한 사람. 나약함을 한없이 드러내고 싶은 사람. 나는 나약하니 제발 도와달라고. 나 좀 신경 써달라고 울부짖고 싶지만 결과는 동정뿐. 결국 나의 삶은 내가 헤쳐나가야 된다는 단순한 정답 때문에 한없이 드러내지 못하고 매일매일 마음속에 징역을 받아가며 오늘 하루도 살아간다. 죄인, 당신에게 오늘 하루의 삶을 선고합니다. 향후 양형의 여부는 내일 다시 심의합니다. 지식이 나에게 송사한다. 이런 한심한 새끼 끈기 없고 참을성 없는 놈. 유독 너 삶만 예민하더냐. 엄살쟁이.
마주하는 낯선 얼굴들이 보내는 미소에 대한민국산 거짓 미소를 다시 발산해 준다. 이건 짝퉁이다 이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