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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아저씨 Jan 17. 2020

2. 슈퍼맨의 망토

이민일기 1 & 2

어제 퇴근길에 슈퍼맨 망토를 두르고 펄쩍펄쩍 뛰어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아이 3명을 보았다.


문득 그 모습에 나의 어린 시절과 이민 생활이 함께 투영되었다. 이민 1세대들에게 이민이란 어린시절 슈퍼맨 망토를 두르고, 높은 장독대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슈퍼맨이 지금의 아이언맨 같은 울트라 슈퍼 히어로였던 나의 대여섯살 어린 시절, 어떤 아이는 망토도 없이, 어떤 아이는 집에서 가져온 보자기를 망토삼아, 그리고 좀 사는 집 아이는 문방구에서 산 슈퍼맨의 S자가 선명한 망토를 목에 질끈 감아매고 마치 슈퍼맨처럼 하늘을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는 자신의 키보다 두배는 높은 장독대에서 과감하게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뛰어내린 뒤에는 시멘트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발바닥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관통하여 머리끝까지 울리는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는 눈들이 있는지라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할 수 밖에... 이어 다음번 아이는 앞서 뛰어내린 친구를 보며 나도 괜찮으리라 생각하고 뛰어내리고, 또 그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으로 자신의 용감무쌍함을 증명하고자 했다. 


보자기도 없이 뛰어내렸던, 보자기를 묶었던, 슈퍼맨 망토를 둘렀던 온몸을 관통하는 아픔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철부지 꼬마 시절에는 슈퍼맨 망토를 두르고, 바지 위에 팬티를 입는 것으로 결의를 다지면 진짜 슈퍼맨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었었으리라.


요즘 들어 이민 생활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종류의 비자를 갖고 있던, 그것이 슈퍼맨의 망토인 듯, 대부분 언젠가는 날아 오르리라는 희망을 갖고 호주땅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리고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온몸을 관통하는 아픔을 느끼며, 때로는 헛된 희망에 몸을 던진 것은 아닐까 후회를 하는 순간도 다가온다.


하지만, 그 장독대에 올라간 만큼, 그리고 뛰어내린만큼, 또 아픔을 참아낸만큼, 딱 그만큼 성장한 것임이 분명하다.


- 이민 일기 1  (지금은 시드니에 살고 있지만, 대략 5년전쯤 멜번에 살고 있을 때 썼던 글이다.)


 얼마전 우연히 예전에 봤던 ‘건축학개론’ 을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무어라 설명할 수 없었던, 20년도 넘게 지난 막 스무살이 되었을 즈음의 감정이 아련하게 가슴속에 몽울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보았을 때는 어느 순간 갑자기, 사춘기인 딸 아이에게 너무 현실적이기만 한 40대 중반인 나의 사고 수준을 들이대고 있구나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논리적이기 보단 감성적이고, 현실적이기보단 이상적인 그 나이때의 소중한 시간들은 당연히 보호 받아야만 할 딸 아이의 권리이자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는 성장의 과정인데,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고 현실만 생각하는 나의 우둔함이 결국 딸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지 못해 살갑지 못한 관계가 된 원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었다. 내가 딸아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는 논리로 딸아이가 나의 생각을 이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신해철씨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는, 그의 노래를 다시 들으며,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 돈, 사회적 지위 따위는 단 하나도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던 25년여전의 철부지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런 것들이 문득 10년전 이맘때는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이민을 하게 되고, 태어나 40년 동안 들어본 적도 없던 애들레이드라는 공간을 거쳐 이곳 멜번에 자리를 잡은 나의 이민 생활을 돌이켜보고 싶게 만들었다. 아마 요즘 메너리즘에 빠진 나의 생활도 이런 맘을 부추기지 않았나 싶다.


 2008년 봄 직장을 옮기면서 시드니로 두 달간 교육을 다녀 온 후 진지하게 이민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두어차례 다녀갔었지만, 이번에는 2년전 이민을 와 자리를 잡고 있던 친구 때문이었는지 이민이라는 두 글자가 실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영주권과 직장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이민 오지 마라!’ 라던 친구의 충고에 우선 어떻게 하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10년 넘게 외국계 IT 기업에서 일한 경력과 토익 840점이라는 말에 이민 법무사는 기술심사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고, IELTS each 6.0 도 충분히 6개월 안에 받을 수 있다며 매우 낙관적으로 얘기를 했다. 그 낙관적인 전망 때문에 영어에 덜 집중한 탓인지 아니면 이민에 대한 절실함이 부족했는지 번번히 speaking 에서 0.5 점 모자란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2009년 12월, 드디어 IELTS each 6.0 이 넘은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이제 유효기간이 지난 기술심사를 다시 받고, 접수만 하면 영주권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2010년 2월초, 기술심사가 들어가 있던 중 호주 이민성이 기습적으로 이민법 변경을 발표했다. 어쩔 수 없이 주정부후원 독립기술이민으로 진행을 했고, SA 주정부 후원으로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


 2010년 가을 초기 입국을 위해 2주간의 휴가를 내고, 시드니와 애들레이드를 관광하고 돌아왔다. 이후 우리는 가족 회의를 거쳐 이민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 2학년 이었던 아이들은 이민이 마치 무슨 모험 여행을 떠나는 것인 듯 살짝 들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민을 가기 전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애들레이드로 이민을 떠날 사람들과 여러차례 만남을 갖기도 했다.


 직장이 없으면 이민 오지 말라던 친구의 충고는 무시한채 2011년 7월 15일 인천공항을 떠나, 말레이시아를 거쳐 16일 아침에 드디어 애들레이드 공항에 도착을 했다. 


 남극의 차가운 바람이 느껴지는 한겨울의 애들레이드 공항은 왜 이리도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던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근거 없는 자신감, 외국 생활에 대한 우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함 등이 애들레이드 공항에 발을 딛던 내가 한번에 느꼈던 감정들이었던 것 같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가 있는 한국을 1년에 한번은 방문해야지 하면서 떠났던 길이지만, 정착을 하기 위해 호주땅에 발을 내딛던 순간, 생각처럼 자주 한국 방문을 하지는 못할것이라는 예감이 엄습해왔다.


-       이민일기 2


내가 이민을 오던 2011년은 호주달러 1달러가 1150원에서 1200원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휘발유값은 리터당 1.6 달러선에서 머물러 있을 때였다. 그 당시 한국에서 벌어놓았던 돈을 가져와 생활을 해야 했던 우리 가족에게는 환율이 790원에서 810원 사이에 있고, 휘발유값이 리터당 1.2달러선에 머물러 있는 지금 호주로 이민을 오는 분들이 너무나 부러울 따름이다.


임시숙소에 머물면서 차를 구매하고, 아이들 학교 입학을 시키고, 월세집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인스펙션을 다녔다. 밤마다 느린 인터넷과 싸우며 인스펙션 갈 집의 주소와 시간등을 정리해놓고, 아이들을 학교 보낸 후에는 인스펙션과 함께 정착을 위한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가고 있었다.


이민 초기에는 가격표를 보면 3달러가 그냥 3달러로 계산이 되지 않고, 3450원으로 계산이 되었다. 동네 마트마다 반값 과자와 반값 아이스크림이 넘쳐나는 한국 마트의 가격을 생각하면, 수입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먹고 싶다고 해도 한봉지에 3500원에서 5000원에 이르는 과자를 도저히 집어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시간에 6000원에 육박하는 시티 주차장은 그야말로 공포감을 줄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당 45만원에 육박하는 렌트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항목이라 그런지 무덤덤하기까지 했다.


정착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매일같이 아이들에게는 밥만 먹이다가 장을 보러갔을 때, 문득 이럴려구 호주 온 것은 아닌데 라는 생각에 오늘은 아이들이 과자를 집어들면 사줘야지 라고 맘을 먹었다. 딸내미가 ‘아빠 이거 먹고 싶어요.’, 나는 ‘그래 사.’, 또 ‘이것도 먹고 싶어요’, ‘그래 사’ 를 반복했다. 세번째 과자를 집은 딸내미가 또 사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는 갑자기 ‘아빠, 오늘 왜 그래요? 우리 먹고 싶은 거 다 사주고 버릴려구 그래요?’ 라고 묻는 것이었다. 불과 일주일 남짓한 이민 생활에서 집사람과 나의 모습이 얼마나 궁색했으면 아이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왔을까 하는 마음에 한없이 서글퍼졌다.


렌트를 구하고, 이삿짐을 받은 후 심리적으로는 조금씩 안정이 되어갔다. 이곳저곳 이력서를 뿌려도 연락 오는 곳은 없었지만, 아직 초기라는 생각에 그다지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를 가볍게 한바퀴 돌기도 하고, 아이들 학교를 보내고 나면 별로 한 일도 없는데, 다시 아이들 돌아올 시간이 되고, 저녁을 먹고 나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온 한국 가족들과 술 한잔이라도 하고 나면 일주일도 금방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시도때도 없이 서로의 집을 오며 가며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아마도 이민 초기의 불안함과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모 돈벌이 될 것이 없나 하는 마음이었던 듯 싶다. 간혹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고마운 분들과의 인연도 참 많았었다.


일상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나서는 TAFE 의 4주짜리 이민자 구직 과정을 등록해서 수강을 했다. 호주식 이력서 쓰는 방법, 인맥을 넓히는 방법, 모의 인터뷰 등을 하면서 조금씩 영어 실력도 향상시키고, 자신감도 높이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형편 없는 영어 실력으로는 구직이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간혹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와서 두어차례 만나보기는 했지만, 그 이상 진전되는 것은 없었다.


취업시 반드시 레퍼런스가 필요한 호주에서 더군다나 바닥이 좁디 좁은 애들레이드의 IT Job market 은 수요보다는 공급이 많은 듯 했고, 그 지역에는 인맥도 없고 영어도 한없이 부족한 나같은 이민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없는 듯 했다. 더군다나 자본이 충분한 기업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UNIX, Oracle, EMC storage 등의 knowledge 를 가진 내 background 를 필요로 하는 곳은 Defence 쪽 project 가 유일한 듯 했으나, 이곳은 시민권이 필수였다. 모 시민권이 있었다 하더라도 99% 는 가능성이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민 생활이 6개월이 넘어가면서 수입이 없는 상황은 걱정의 수준을 넘어 나를 점점 공포로 몰아 넣었다. 한동안 여유가 있으리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통장 잔고는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큰 부담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보냈던 흔히 준사립이라 불리는 카톨릭 학교의 학비와 아이들의 빠른 적응을 위해 보냈던 학원 수강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아마도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2배의 속도로 돈이 줄어들었던 것 같다.


그냥 놀고 있을 수 만은 없어, TAFE 의 영어과정 (Diploma of English Proficiency)에 등록을 하여 본격적으로 TAFE 을 다니며 2012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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