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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밴쿠버 딸기아빠 Feb 16. 2020

뒷북치는 '기생충' 리뷰 - 오스카를 석권할 만한 걸작

기생충은 에너지가 대단한 영화다.  기생충의 캐나다 개봉을 기다리다가 지쳐 TV로 먼저 보게 되었는데, TV 화면에서 나오는 그 에너지를 한 번에 다 받아내기가 힘겨워 몇 번을 끊어서 봤다. 극장이었다면 꼼짝없이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밖에 없었겠지만, TV를 통해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리모컨의 Pause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그렇게 끊어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은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영화였다.


기생충을 본 직후에는 우선 그 외형적 완성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상언어 구사력은 실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장면 구성과 동선, 등장인물들의 동작과 표정 등, 언어적 요소가 아닌 시각적인 요소에 메시지를 함축시켜 넣는 능력에서 봉준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화사를 통틀어 이 정도로 영상언어를 잘 사용하는 감독은 흔히 않을 것 같다.(내가 세상 모든 감독의 영화를 본 것은 아니니, 봉준호가 최고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렇다)  스토리의 완성도 역시 매우 높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기괴하면서도  독창적인 스토리인데, 그 전개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이런 독창적인 스토리가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매끄럽게 결말까지 전개되었다.


사실  영화의 내용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보고 난 직후에는 내가 대체 무엇을 본 것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뭔가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 맞은 것 같기는 한데, 무엇에 맞은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점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 봉준호의 영상 작법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 그 시점에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감상이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며칠 동안이나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영화를 통해 봉준호가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러다가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봉 감독이 영화 속에 의도적으로 묵직한 메시지를 심어 놓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며, 그저 그가 직관적으로 파악한 세상의 진짜 모습과 인간의 본성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려 했을 뿐이었다는 것을. (물론 이건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다. 봉 감독의 진짜 속마음이야 봉 감독 본인 말고 누가 제대로 알겠는가?)


세상은 기생충이 '계급 갈등'에 대한 영화라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가 '계급 갈등'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급 갈등을 다룬 영화는 흔히 그 갈등이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이나 불평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그런 구조적 결함에 의해 필연적으로 비극이 발생하는 과정을 묘사하곤 한다. 한 영화가 여기까지만 개연성 있고 공감 가는 스토리로 잘 뽑아내도 명작이나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기생충은 계급 갈등을 다룬 영화들의 이런 뻔한(?)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다. 이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큰 보폭으로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간다.  나는 바로 이 점이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이라는 영화의 가장 놀라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기생충은 계층 갈등의 전형적인 구도인 '약육강식'의 관계를 깬다.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약자인 빈자들이 강자인 부자에 기생하면서 그들의 살을 파먹고 산다. 강자인 부자도 약자인 빈자를 착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빈자들에게 갑질하지 않으며 보수도 후하게 준다. 소위 말해 '착한 부자'다. 반면에 빈자인 송강호의 가족은 흉악한 범죄자는 아니지만, 염치와 양심 같은 것은 개나 줘 버린 지 오래이며 남을 속이고 신의를 배반하는 일에도 주저함이 없다.


또한 부자인 이선균은 혁신적인 IT기업의 사장으로 그려지며, 약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부를 축적하는 악덕 자본가가 아니다. 빈자인 송강호의 가족은 강자들에게 착취당해 가난해진 것이 아니며, 반복된 사업 실패로 가난해졌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강자(부자)와 약자(빈자)의 사이에는 착취와 피착취라는 전형적인 계급 갈등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족(세 가족?)이 맞이하게 되는 비극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나는 봉준호 감독이 사회의 구조적 결함이 가져온 계층 간의 갈등 관계를 뛰어넘어, 그 기저에 깔려있는 인간 본성을 발견하게 그에 주목했다고 생각한다. 이 본성은 부자들만 가지는 것은 아니며, 빈자들만 가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바로 직관적으로 사람의 등급을 정하고 마음속에서 그들을 계층별로 분류한 후, 그 계층에 따라 차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차별 본능'이다. (이런 심리에 대해 설명하는 어떤 학술적 용어가 있는지 궁금하다)


부자들은 '냄새'를 통해 본능적으로 빈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계층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다. 그렇다고 빈자들을 대놓고 무시하거나 멸시하지는 않는다. 존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하고 대접도 후하게 해 주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선을 넘어' 자신들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다. 빈자들은 부자들의 파티에서 일을 하고 시중을 들 수는 있지만, 절대로 손님으로 초대받을 수는 없다.


이 영화에서는 부자 가족과 빈자 가족을 통해 인간의 본능적인 차별 본능을 그려냈지만, 사실 이런 차별 본능이 반드시 빈부 격차에서만 발동되는 것은 아니다.  인종, 지역, 성별, 나이, 학력, 외모, 직업, 재산 등의 수많은 기준으로 거의 무의식적이자 본능적으로 계층을 구분한 후 자신보다 아래의 계층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타자를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본능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차별 본능이 송강호가 이선균을 죽이고 두 가족이 모두 비극적 파국을 맞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이와 같이 봉준호 감독은 계층 갈등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우리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차별 본능'이라는 우리 모두의 민낯을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통해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꾸준히 성장했고, '기생충'으로 정점에 올랐다. 봉준호만큼 영상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감독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봉준호만큼 직관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을 가진 감독은 더더욱 드물다. 둘 다를 할 수 있는 영화감독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는 봉준호 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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