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유포트없는 11개월

생후 11개월 때의 기록

by 햇살바람


육아월드에서 남편과 전우애를 다진 지도 11개월이 지났다. 아기를 옆에 두고 가끔 서로 욱할 때도 있지만 처음에 비하면 이제는 제법 호흡이 잘 맞는다. 저녁에 같이 아기를 씻기고 분유를 먹이고 나면 내가 아기를 재울 동안 남편은 자연스럽게 젖병 소독을 하러 간다. 이유식을 만들 때는 내가 밥과 고기와 재료를 준비해서 밥솥에 넣는 동안 남편은 재료 다지기와 설거지를 담당하는 식이다. 기저귀 갈기며 옷 갈아 입히기며 대부분의 일들을 이제는 물 흐르듯 호흡을 맞춰 척척 해낸다.


그런 남편이 아직 마스터하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분유 온도 맞추기! 내가 버둥거리는 아기를 안고 분유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 종종 뜨거운 분유를 들고 와서 그걸 한바탕 식히느라 시간이 걸릴 때가 있다. 팔팔 끓인 생수와 그냥 생수를(처음 몇 개월은 끓인 물을 다시 식힌 것을) 준비해 두었다가 분유를 탈 때 적당히 섞어서 온도를 맞추는데, 간혹 가다 비율을 잘못 맞춰서 뜨거운 물을 더 많이 부어버리고는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아 분유포트를 샀어야 하는데' 하는 강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다. 우리는 분유포트 없이 1년을 버텼다. 물론 옛날이야 그런 육아템 없이 아기를 키우는 게 당연했겠지만, 물 온도를 알아서 맞춰주는 기술의 혜택을 누리지 않은 덕분에 실제로 꽤나 번거롭기도 했다. 신생아 시절에 우리 집에 왔던 산후도우미 분은 분유포트가 없는 걸 보고 난색을 표했던 기억이 다.


굳이 분유포트를 사지 않겠다고 작정했던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부지런히 육아템을 알아보지 않았던 탓도 있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야 필요한 것들을 부랴부랴 찾아보기 시작했는데, 나는 처음에 분유포트라는 게 있는 줄 모르고 분유제조기라는 게 있는 줄만 알았다. 분유제조기는 분유포트보다 더 최근에 나온 혁명템으로, 물 온도뿐만 아니라 물 양과 분유 양까지 설정한 대로 알아서 분유를 타주는 물건이다.


하지만 가격이 20만 원 대였기 때문에, 살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에 100일이 흘렀고, 그때서야 분유포트라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분유포트는 분유제조기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생후 4개월이 지나고서부터는 하루에 정신없이 수유를 하던 대혼란의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가고, 당시에는 또 혼합수유(모유수유+분유수유) 중이라 분유만 주는 것도 아니다 보니, 저렴한데도 살까 말까 하는 고민이 또 시작됐고, 그러다 수유 횟수가 4번으로 줄면서 '에이 하루에 몇 번 먹지도 않는데 그냥 사지 말자' 이렇게 된 거다.


아기를 낳고서야 알았지만 정말이지 기발하고 참신한 육아템들이 많았다. 아기의 개월 수가 지날 때마다 새롭게 필요한 것들이 등장해 "지금 시기에는 내가 꼭 있어야 된다"며 내게 속삭였다. 꼭 필요한 걸 내가 놓칠까 봐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곤 했고, 그것들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동안 머리가 아팠다.


'아기가 잘 먹고 잘자면 됐지 뭐'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조금 힘들어도 몸으로 때우자 생각하며 어느 정도 내려놓게 됐고(그런 식으로 아직 아기띠도 사지 않았다), 정말 힘들거나 불편할 때만 육아템을 찾아봤다. 장난감을 욕심만큼 못 사는 것도 '조선시대에는 저런 장난감 없이도 아기들이 잘 컸다'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됐다.


그럼에도 육아템의 홍수 속에서 안타깝게 놓친 게 있다면 분유포트였던 것. 하지만 이렇게 지나고 보니 꿋꿋하게(?) 버틴 세월이 어쩐지 뿌듯하기도 하다. 물론 1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분명 분유포트를 사겠지만.


남편은 분유포트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 날 베이비 카페에 갔을 때 내가 이유식을 먹이는 동안 분유를 타 온 남편은

"버튼을 눌러서 물을 받았는데 온도가 맞는 것 같아."

하며 자신이 본 것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짠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동안 분유를 타느라 고군분투하던 남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분유포트와 분유제조기라는 게 있다는 걸 알려주자 "아 진짜?" 하며 '근데 왜 사지 않았어?'라고 묻는 듯한 원망이 잠시 눈에 스쳤던 것도 같다.


아마 호야가 그동안 먹은 분유는 온도가 들쭉날쭉했을 거다. 어느 날은 따뜻하고 어느 날은 미지근했겠지. 그래도 다행히 분유를 거부한 적은 거의 없었다. 분유를 타는 데 1~2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쩌면 그 시간 동안 호야가 기다리는 법을 조금은 배우게 되지 않았을까? 엄마 아빠의 정성과 손맛을 더 느끼지는 않았을까?(라고 좋게 생각해본다)


이제 돌이 지나면 분유를 슬슬 끊게 될 테니 이런 일들도 나중에는 추억이 될 것 같다. 그때 맨날(맨날은 아니지만) 뜨거운 분유 들고 왔던 거 기억나냐고 웃으며 말하겠지. 그런 추억거리가 생긴 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물론 아까도 말했다시피 아기가 태어났을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추억보다는 편리함을 선택할 것 같다).



네가 잘 먹어주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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