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바람 Jan 25. 2021

육아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10가지 이유


호야는 이제 13개월이 됐다.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지금까지 대략 21개월 동안, 다행히도 임신과 육아로 우울증을 앓은 적이 없다.


'그게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심 걱정이 됐다. 워낙 혼자 땅 파는 성격이기도 하고, 육아 우울증이 흔하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피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지 못했다. 우울증은 내게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에도 우울증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아파서 2년 반 전쯤에 정신의학과를 찾아갔었고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항우울제를 먹었다.


내가 육아 우울증을 앓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짐작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서 그것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1. 남편과 시부모님의 도움

외부적인 요인을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임신과 육아는 여자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무척 고된 일이기 때문이다. 육아를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미혼모 등 혼자서 아기를 키운 이들이 존경스럽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들도 주위의 도움이 아주 없진 않았을 수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 힘든 일을 혼자서 해냈을까. 겪어보니 알겠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나는 남편이 육아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사소한 일 하나라도, 예를 들어 분유를 타는 일이나 기저귀를 주문하는 일 등, 내가 부탁하는 것은 거절한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나보다 꼼꼼하게 챙겼다. 가장 도움이 된 것은 나를 항상 걱정해줬다는 거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하고 물어봐줬는데, 나는 남편이 그렇게 물어봐주는 게 정말 좋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한마디지만 그 안에는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 나를 향한 관심, 사랑이 다 담겨 있다. 남편은 내가 밥을 제대로 못 먹었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 얼마나 형편없이 먹었는지를 한번 말해보라는 뜻으로 그 질문을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늘도 이렇게 못 먹었다고, 오늘도 이렇게 힘들었다고 어리광을 실컷 부렸다. 그러면 남편은 내 말을 듣고 "에휴" 한마디 한다. 고정된 레퍼토리이다. 하지만 그런 짧은 대화만으로 충분한 위로를 받았다. 만약에 그런 대화가 없었다면, 열심히 버틴 내 하루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 많이 쓸쓸했을 것 같다. 남편의 정서적인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친정 부모님은 사정상 아기를 거의 봐주지 못했지만, 100일 이후부터는 시부모님이 1~2주에 한 번씩 아기를 봐주신 게 큰 도움이 됐다. 덕분에 남편과 나는 부족한 잠을 자거나 밖에서 밥을 한 끼 먹고 오는 등 숨 돌릴 틈을 가질 수 있었다. 남편과 내가 동시에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남편과 내가 싸울 일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걸 뜻했다. 서로 지쳐서 모난 말들이 오고 갈 때쯤 시부모님이 아기를 한 번씩 봐주시면 우리 가족은 다시 평화로워지곤 했다.


만약 이런 도움 없이 육아를 하며 우울해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이 너무 당연한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육아는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명의 아기를 키우는 데 최소한 3명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 안정적인 직업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안정적이라 아기를 키울 때 도움이 됐다. 경력 단절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쓸 때 눈치 보는 일도 없었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 나의 쓸모에 대해 걱정하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됐고, 조금이지만 들어오는 월급도 위안이었다. 무엇보다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아기와 있는 시간을 소중히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컸다. 무엇이든 정해진 끝이 있으면(예를 들면 여행처럼) 그동안의 시간을 더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3.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았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아기와 있는 동안 성인의 생각과 말이 그리워서 인스타와 브런치와 유튜브를 들락거리다 보면 나보다 돈 많고 자기 관리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 빽빽이다. 조금만 방심하면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가령 출산 후에도 날씬하고 잘 꾸미는 엄마들은 의식적으로 비교하지 말아야 할 대상 1호다. 어떤 면에서는 브런치가 도움이 되었다. 드러나는 겉모습의 허락된 일부만 볼 수 있는 인스타에 비해 브런치는 내게 내밀하고 깊은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덕분에 남과 비교하느라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4. 어느 정도 포기하는 마음

"언니, 매일 피정 봉사하는 기분이야."

출산 전에, 나보다 4개월 먼저 출산한 성당 동생이 했던 말이다. 청년을 위한 2박 3일짜리 피정 봉사를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봉사의 어려움 중 하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잔다는 거였다. 언젠가는 이틀을 합쳐서 5시간 정도 잤던 것 같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피정 봉사를 하는 기분이 들어."

아기를 낳고 그 동생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한동안 밤마다 아기 울음소리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눈도 못 뜬 채 수유를 하면서, 자는 건지 깨어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몽롱한 경계 속에서 어떻게든 오늘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처음 100일은 정말 봉사하는 마음으로 아기를 봤다. 이후에도 아기가 심하게 보채는 날에는 그냥 마음을 비운다.




5. 아기의 통잠

아기의 수면교육을 거창하게 하진 않았지만 아기가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아기를 처음으로 믿어준 기억). 아기에게 꿀잠을 선물한다는 <똑게 육아> 책을 3번 이상 읽었고 관련 유튜브 영상들도 찾아봤다. 그중 내가 취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아기를 재웠다. 다행히 아기는 4개월 이후부터 잘 자줬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저녁 7시 반 전에 잠들어서 12시간 통잠을 잤고, 밤수는 생후 5개월 때 거의 사라졌다.


아기를 재울 때 도움이 됐던 것들을 꼽아보면,

- 아기가 잠든 지 얼마 안 돼서 울 때 정말 깬 것이 맞는지 길면 5분 정도 관찰했다(는 동안 다시 잠든 경우가 많다).

- 아기가 허리를 세우고 몸을 뻗치면 눕고 싶다는 뜻이라고 해서 그럴 때마다 아기를 눕혔다(계속 안고 있을 때보다 잘 잤다).

- 잘 먹이는 게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규칙적으로 정해진 양을 먹였다.

- 낮에 너무 피곤하면 오히려 밤잠을 못 잔다고 해서 낮잠도 신경 써서 재웠(아기가 졸린 것을 알아챌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돌 전에는 졸린 기색이 보이기 전이라도 일어난 지 2시간이 지날 때쯤 간을 보기도 했다(지금은 아침에 일어난 후 3시간이 지나면 낮잠을 재워본다).

- 아기를 세워서 안은 채로 무릎을 굽혔다 펴며 위아래로 움직여주면 아기가 안정감을 느껴서 잠을 잘 잤다.


아기가 잠을 잘 자면 나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고, 그러면 하루가 버틸 만했.




6.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

아기가 잠든 시간에는 독서든 글쓰기든 가능한 한 내가 발전할 수 있는 일을 잠깐이라도 했다. 하루 종일 아기의 옹알이를 따라 하는 수준의 말만 하다 보면 멍 때리는 순간도 많았고 하루가 의미 없이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서 하루에 짧으면 30분이라도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다.




7. 괜찮은 척하지 않았

남편에게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고 내가 원하는 도움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예를 들면 젖병 소독은 남편 담당이었다. 또 남편의 옷을 다려주지 못하겠다고 하는 등 내가 못하겠는 부분도 전달했다. 아기를 돌보느라 기진맥진인데 다 큰 성인까지 돌봐야 한다는 게 힘에 부치기도 했고 내키지 않기도 했다. 남편이 구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우리는 서로 스트레스받지 않았다.




8. 아기에게 화내지 않았

아기가 태어난 지 30일 정도 됐을 무렵에 아기에게 화를 낸 적이 있다(아기에게 처음 화를 내던 날). 화를 는 건 아기에게 좋지 않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꽤 타격을 주는 일이었다. '내가 엄마로서 자격이 있나', '저 작은 아기에게 화를 내서 어쩌자는 건가' 하는 자괴감과 자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엄마로서 없는 자신감도 만들어야 할 판에 스스로를 갉아먹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아기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아기가 밑도 끝도 없이 짜증 부리고 소리를 지를 때는 부정적인 감정이 자꾸 나에게 부딪치기 때문에 화가 끓어오르는 걸 막을 순 없었지10초 정도 무념무상으로 있으면서 화를 삭였다(내 몸에서 사리가 나온다면 백 프로 육아 때문이다).




9. 원래 그다지 예쁜 몸이 아니었다

어떤 이는 출산 후 망가진 몸 때문에 우울해지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출산 전에도 그다지 예쁜 몸이 아니었다. 그래서 살을 빼야 한다는 압박이 있긴 해도 딱히 그리운 몸매는 다.




10. 임신 전에 겪었던 우울증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기 때문에 육아 우울증이 올까 봐 걱정했다고 앞에서 말했지만, 한편으로는 임신 전에 바닥을 한 번 쳤던 게 도움이 된 면도 있다. 내 안의 어린아이와 나름 화해하는 과정을 거친 게 도움이 됐다. 나에게 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알게 됐기 때문에 상처 입을 만한 상황에서 무방비상태로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임신 사실을 안 이후부터는 내 마음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조심하게 되는 계기도 됐다. 내가 우울해지면 바로 영향을 받게 되는 존재가 생겼기 때문이다.





몸살이 몸을 돌보라는 신호라면 우울증은 마음의 몸살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가 됐다는 뜻이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이렇게 써놨지만 나 역시 내일 당장 육아 우울증을 앓을지도 모른다. 복직을 하면서 아기와 떨어지게 되면 감정이 한없이 곤두박질 칠지도 모른다. 뭐, 그때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하려고 한다. 그때는 우울한 마음에 대해서 한바탕 썰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0 버킷리스트 결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