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수업
내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다. 1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 어머니는 전업 주부셨다.
말단 경찰이셨던 아버지의 박봉만으로 자식들을 키우기 어려워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 장사를 하셨다고 한다. 번듯한 가게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큰 다라이를 짊어지고 물건을 파셨다. 작고 아담한 체형인 어머니는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하신 탓에 늘 아픈 곳이 많으셨다. 그 시절 어머님들이 대부분 그러셨겠지만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 한번 제대로 하신 적이 없으셨다. 몸이 버텨내는 것이 이상할 정도라고 말씀하셨다. 아파야 하루 정도 쉬는데 아프지 않으니 쉴 수 없으셨다고 한다. 아마도 자식들 건사하느라 초인적인 정신력이 발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늘 자식들이 태어난 달이 되면 어머니는 뼈 마디마디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셨다. 내가 막 직장에 들어갔을 무렵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몇 개월간 입원을 하신 적도 있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원에 가면 병을 낫게 해 주지는 못해도 병명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어머니의 병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는데 다행히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셨다. 하지만 그 이후로 어머니는 더 쇠약해지셨다.
아버지는 꽤 무뚝뚝하셨다. 아버지께 칭찬을 받아본 적도, 야단을 맞은 적도 없었다. 그런 아버지께 딱 한번 매를 맞은 경험이 있었다. 초등학교 2~3학년 정도였던 것 같은데 감기에 걸린 나는 혼자서 병원에 가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아이 혼자 병원에 보낸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 나는 워낙 총명해(?) 종종 그런 적이 있었다. 나는 병원에 가다가 근처에 있는 오락실에 잠깐 들렀다. 그 당시에 부모님이 절대로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곳이었으니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이들이 하는 오락 구경에 두 시간이 지난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시간을 알아차리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엄마와 누나들이 나를 찾느라 난리가 난 것이었다. 결국 이 소식은 퇴근한 아버지한테까지 전해졌고 어머니의 만류에도 종아리 수 십 대를 맞게 되었다. 매로 벌겋게 부은 종아리를 보고 어머니는 내내 우셨다. 연고를 발라주시는 손도 함께 울고 있었다. 아버지도 속으로 우셨을지 모르겠다. 이후로는 아버지께 매를 맞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무뚝뚝함의 대명사 같았던 아버지가 지금은 '우리 아들' 이라든지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다 하신다. 어릴 적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우등상을 받았지만 한 번도 아버지 칭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대학도 4년 장학금으로 입학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칭찬을 받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직접 말씀드려 보기도 했지만 그 시절 아버지는 결국 칭찬 한번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에게 부정(父情)은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어머니는 항상 나를 응원해 주셨고 그늘이 되어 주셨다. 나도 어머니 말이라면 거스른 적이 없었다. 고3 때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반대하셨고 바로 포기했다. 사실 이때를 제외하고는 어머니가 특별히 나에게 뭔가를 하라고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 흔한 '공부해라'라는 말도 하시지 않았다. 고2~3 시절에는 7시에 등교해 12시 넘어 집에 왔다. 독서실에 다닐 때에는 2~3시에 집에 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늘 잠이 부족한 나를 안쓰러워하셨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가 라면 먹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는데 그래도 먹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꼭 계란을 넣고 끓여 주셨다. 나쁜(?) 것을 먹이는 어머니 마음에 계란은 영양가를 보충해주는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강원도, 어머니는 경상도 분이시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했다. 어머니께 여쭤봤지만 너무 옛날이야기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어머니 나이 스물 하나, 아버지 나이 열아홉에 만나 결혼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첫눈에 반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결혼식 사진도 없고 결혼기념일도 잊어버렸다고 하신다. 사연이 있는 듯했지만 거기까지 여쭤보지는 못했다. 한 번은 어머니 젊었을 때 사진을 봤는데 큰 누나랑 정말 똑같은 모습이었다. 사실은 큰 누나가 어머니를 닮은 것이겠지만 사진 속 젊은 어머니는 엄청 미인이셨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이 모습에 반했음이 틀림없다. (이것 만큼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하지만 두 분의 관계는 (내가 볼 때) 언제나 어머니의 아버지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아버지는 성실한 가장이셨지만 어머니에게만큼은 좋은 남편이 아니셨다. 지금은 집안 청소나 설거지도 해 주시지만 예전에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어머니가 항상 내게는 나중에 결혼해서 아내를 많이 도와주라고 하셨던 것이다. 어쨌든 어머니는 불평 한번 안 하시고 언제나 아버지를 사랑하셨다.
어머니는 호된 시집살이를 하셨다. 할머니는 여장부 스타일이셨는데 나한테는 최고의 할머니셨지만 어머니한테는 무서운 시어머니셨다. 화라고는 전혀 내시지 않는 어머니도 시집살이 이야기를 할 때면 머리부터 절레절레 흔드신다. 눈물도 잘 흘리신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남편 하나만 믿고 사는 시집살이 서러움이 어땠을지 아들인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오랫동안 지병으로 앓아누워계신 시아버지를 돌봐야 하셨고, 어린 시동생들까지 챙겨야 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버지는 누나 둘을 낳고 군대를 가셨다. 어머니 시집살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몇 권은 나올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웃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당신께서는 절대 며느리한테 시집살이를 시키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즘도 그걸 지키시려고 노력하신다. 아내와 결혼한 지 17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우리 집에 다녀 가신 것은 세 번뿐이셨다. 손자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먼저 전화하시지 않는다. 며느리 스트레스받으실까 봐 염려해서이다. 아내도 시집살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
매일 어머니께 전화를 드린다. 모시고 살지 못하는 죄책감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누나들이 가깝게 살아서 매일 집에 와서 부모님과 화투도 치고 모시고 나가서 외식도 한다. 누나들한테 고마울 따름이다. 늘 아끼고 검소한 생활이 몸에 익은 분들이라 외식이라고 해봤자 짬뽕이나 막국수 한 그릇을 드시는 것이 전부이다. 자식들이 돈 쓰는 것도 부담스러워하신다. 용돈을 많이 드리지는 못하지만 그나마도 모아 두셨다가 결국에는 손주들한테 쓰신다. 아낌없이 주고도 더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올 해는 어머니가 팔순이 되는 해이다. 내 눈에 어머니는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어머니는 이제 많이 늙었다고 하신다. 팔순 잔치는 따로 안 하고 가족들만 큰 누나네 시골집에 모여 1박 2일을 보내기로 했다. 한 10년 전쯤부터 내가 제안해서 1년에 한 번 가족여행을 가기로 했다. 부모님과 어린 시절 이야기도 나누고 손주들과 좋은 추억도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몇 번 하다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다들 살기 바빠서 모이는 것도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손주들까지 모두 모이기로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올 때 좋은 카메라가 있으면 꼭 가져오라고 하셨다. 가족 모임에 카메라는 늘 챙겨갔던 것인데 이유를 여쭤보니 이번에 영정사진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준비할 필요 없다고 애써 웃으며 그 상황을 모면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어머니에게는 오늘이 가장 젊고 고운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누구에게나 오는 순간이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두 분 모두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 좋겠다. 그러다 때가 된다면 한날한시에 손잡고 함께 가시면 어떨까 싶다. 그럼 자식들이야 많이 슬프겠지만 두 분은 마지막까지 행복하시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고향집에 내려가면 나보다 준, 큐 형제를 더 반갑게 맞이하신다. 준, 큐 형제도 춘천에 가면 아내가 말하는 '춘천 모드'가 되어 뭐든지 잘 먹고 잘 놀아 두 분의 사랑을 흠뻑 받는다. 나에게 더없는 최고의 부모님이지만 준, 큐 형제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두 분을 모시고 가능한 여행을 많이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제 차를 오래 타시면 힘들어하셔서 여행길에 나서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내년 봄에는 두 분을 모시고 다시 한번 제주도 유채꽃을 보러 가면 좋겠다. 유채꽃을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밝은 미소를 또 한 번 보고 싶다.
<표지 그림은 아내의 습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