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배우다

인생 수업

by 조이홍

우리 아버지는 경찰이셨다. 보통 3일 근무하시면 하루를 쉬셨다. 그래서 일요일이나 명절에도 출근을 하셨다. 아버지의 시도 때도 없는 출근 덕분에 경찰이라는 직업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 시절 무뚝뚝한 가장의 표본이었고 무척 엄격한 편이셨다. 학창 시절 제법 학교 공부를 잘했던 나였지만 아버지의 칭찬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1등 하면 뭘 받고 싶은지 물어보는 엄마의 질문에 '아빠의 칭찬'이라고 대답했을까.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를 꽤 좋아했다. 아버지는 출퇴근하실 때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는데 쉬는 날이면 앞에는 나, 뒤에는 엄마를 태우고 천렵을 갔다. 말이 천렵이지 아버지는 투망 하나를 챙기시고, 엄마는 휴대용 버너와 라면을 챙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이 천렵이 너무 좋았다. 워터파크도 없던, 있어도 갈 형편이 안되던 시절에 냇가로 천렵을 가면 온통 그곳이 내 수영장이자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투망을 치실 때 어망을 들고 따라다니면서 피라미나 갈겨니 같은 민물고기들을 주워 담기도 하고, 수영복이 없어 팬티(이때는 빤스라고 불렀지만)만 입고 실컷 물놀이를 했다. 물안경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지만 물속에서 눈을 뜨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엄마는 물속에서 눈뜨면 시력이 나빠진다고 했지만 물속에서 눈을 뜨는 것도 굉장한 능력이라고 생각한 나는 멈추지 않았다. (물안경에 익숙한 요즘에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을 물속에서 놀다가 엄마가 끓여 주시는 라면을 먹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엄마는 평소에 내가 라면 먹는 것을 싫어하셨는데 꼭 먹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물론 내가 집요하게 먹겠다고 떼를 부릴 때다.) 꼭 계란을 넣어 끓여주셨다. 지금도 계란을 푼 라면이 제일 맛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좋은 차도, 대단한 장난감이나 놀이기구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신났던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던 그 기억이 오늘의 내가 나답게 될 수 있었던 촘촘한 씨줄과 날줄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나도 아이들과 캠핑을 한다. 장작불을 펴 아이들과 달고나도 만들어 먹고 쫀대기 같은 옛날 먹던 불량식품도 구워 먹는다. 우리 집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밤하늘의 별들도 캠핑장에서 보면 쏟아질 것처럼 많다. 어려서부터,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과는 따로 자지만 캠핑을 가면 우리 가족 넷이 나란히 누워 잘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물놀이가 가장 좋았다. 물놀이를 할 수 없는 캠핑장에는 가지 않았다. 아이들과 족대로 물고기를 잡고, 고무보트를 타기도 한다. 누가 잠수를 오래 하는지 시합도 한다. 예전에는 내가 무조건 1등을 했지만 수영을 오래 해서 그런지 요즘은 2등도 힘들다. 현재 1등은 단연 준이다. 물놀이를 할 때는 나도 아이들도 모두 행복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 조수 노릇을 제대로 했던 탓인지 나도 족대로 물고기를 꽤 잡는 편이다. 족대가 있어도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아빠들도 솔직히 제법 많다. 그런 탓에 우리가 족대로 물고기를 잡기 시작하면 캠핑 온 아이들이 어느새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러면 말은 안 하지만 준, 큐 형제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부모로서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경제적으로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나처럼 '부모와의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 매 순간순간을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은 없다. 아마도 그건 불가능할 것이다. 입시, 취업난, 그리고 그밖에 삶의 모진 파도를 헤쳐 나갈 때 힘이 될 수 있는 작은 씨앗을 아이들의 마음에 심어 주고 싶다. 행복한 추억이 아이들의 삶에 다른 어떤 것보다 힘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내가 해야 할 아버지라는 역할의 가장 현실적인 모델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하고 타산지석(他山之石) 해야 할.